'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의 적절성에 관하여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단어 선택의 무게를 다루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합니다. 이 점을 양지하시고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살'이라는 주제를 자주 접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한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WHO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9년 한 해 자살인구 수는 만 사천여 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28.6명에 이르는 매우 높은 수치다.
다만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높은 자살률이 아니다.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주제를 대하는 언론의 태도다. 모든 사건이 기사화되는 것도 아니고 윤리적 문제, 생명의 소중함 등을 논하기엔 이 주제는 매우 무겁고, 권한 밖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기자협회에서 제정한 신문윤리강령에는 「자살보도 윤리강령」이 상세 항목으로 들어가 있을 정도로 자살보도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진다. "죽음의 방식은 개인의 사적 영역이지만, 언론의 자살 보도 방식이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제시한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자살보도 윤리강령」)
또한 「자살보도를 위한 실천요강」은 '자살'이란 용어를 헤드라인에 쓰거나, 사인(死因)을 자살로 밝히는 것을 피하도록 권고한다. 그 결과 보도를 위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채택된 완곡한 단어가 '극단적 선택'이다. 우리는 이 채택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극단(極端)'이라 하면 보통 어떤 생각이 드는가?
우리는 중용이 미덕이었던 유교 사회의 뿌리를 아주 떨쳐내진 못했기에, '극단'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보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곧잘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한쪽에 치우쳤다는 것은 표준이 아니라는 뜻이 되고 곧 다수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당연히 자살이란 보편적인 죽음의 방식이 아니다. 하지만 이에 따르는 우리의 인식이 문제다.
앞서 언급한 「자살보도 윤리강령」에서도 드러났듯, "죽음의 방식은 개인의 사적 영역"이다. 우리는 그 사적 영역을 '극단적'이라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다. 부정적 프레임을 씌우는 데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타인의 사적 영역을 '극단적 선택'이라는 단어, 그것도 부정적인 어조로 일축하여 언론이라는 무대 위에 올릴 권리가 있는가? 누구에게도 그런 권리는 없다.
유퀴즈 온더 블록에 출연하였던 예일대 나종호 정신과 교수 역시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살을 '선택'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사람이 앓은 질병과 증상을 지워버린다는 이유였다.
나 역시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자살을 대단한 죄악인 것처럼 만드는 사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너머의 본질을 보아야 하며, 그 사람의 권리를 지켜줄 필요가 있다.
단순히 자살이라는 주제뿐 아니라,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꺼낼 때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남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게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남을 관찰하고 평가하고 화제 삼는 것을 유흥거리로 안다. 자극적인 이야기에 끌리고 그것에 동조하며 쾌락을 느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누군가 부정적 영향을 받게 된다면, 분명 문제가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미디어 창구가 수백, 수천 개에 달하는 현대 사회에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침묵보다 나은 말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한다. 잘 말할 수 없다면 하지 않는 게 낫다. 알 권리, 언론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활자에 상처받는 사람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Mental Health and Substance Use, 『Suicide worldwide in 2019』, WHO, 2021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신문윤리강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