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단편
SEOUL - 프롤로그
2006.9 어느 날,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무척이나 습한 날씨.
그런 날씨만큼이나 쳐지고 재미도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제주 서핑대회’와 ‘부산 서핑대회’의 연속적인 굴욕사건(?) 이후 내 어깨는 더욱 쳐졌고
그렇게 자신감을 상실한 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저녁이 찾아오면 의미 없는 발걸음은 언제나 홍대로 향하고 있었고 어김없이 소주를 벗 삼아 밤을 달랜다.
어느 날 한잔 두 잔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들과 서핑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다 어느덧 새벽 4시가 되었고
서핑에 있어서 가장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명곤형 집에 신세를 지기로 하고 형 집에 등을 붙였다.
우리 발리(인도네시아) 갈까?
그날 밤.
이번 여름에 있었던 두 번의 서핑대회에 굴욕을 맛보고 파도에 갈증이 난 우리는 발리로부터의 유혹을 느낀다.
문득 떠오른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과 같은 느낌의 그곳으로 갑자기 너무나 가고 싶어 진 것이다.
“가자. 짐 싸라.”
형의 간결한 한마디와 함께 플레이스테이션, 카메라 그리고 여권 달랑 이렇게만 챙겨 든 우리는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BALI - 지구의 아침
우여곡절 끝에 발리 ‘덴파사르’에 도착했다.
싱가포르에서 왼쪽 눈에 염증이 생겨 비행하는 내도록 통증에 시달리긴 했지만
덴파사르 공항에서의 정겨운 향기와 음악이 날 들뜨게 만들었고,
아픈 눈도 싹 나아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공항 문을 나섰고 곧바로 꾸따(KUTA)에 있는 뽀삐스 거리의 ‘아유 비치 인’으로 향했다.
짐은 대강 던져두고 바로 해변으로 나갔다.
역시! 파도다.
한국의 파도와는 다르게 힘 있고 묵직하게 올라오는 녀석들이 계속해서 해변을 덮치고 있었다.
크하하! 이거다. 이게 발리지. 자 한번 달려볼까?
젠장. 싱가포르에서 말썽이던 눈이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고 난 바로 발리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망막에 염증으로 인한 작은 상처가 났다는 진단을 내렸다.
설마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갈등에 갈등… 하지만 지금 한국으로 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결국 잠깐 입원만 하기로 결정을 하고 그렇게 나는
하루에 거금 rp1,500,000의(한화로 약 16만 원) 입원비를 지불하는
외국인 특별 병동에서 황제 놀이를 할 수 되었다.
발리의 병원은 외국인 병동이 분리되어 특별 관리된다.
이 병원의 경우 1인 1실의 병동 밖에 없었고
가격은 rp1,000,000~rp2,500,000까지 정도.
귀찮아도 절대 여행자 보험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이런 갑작스러운 경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눈의 통증이 가셨다!
이제 다시 바다로 돌아 시간이다.
BAGUS!
(바구스! 발리 말로서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최고’, ‘따봉’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롬복(LOMBOK)으로 떠나기 전날,
비행기 예약과 숙소 예약과 같은 것들을 완료시키고 발리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다.
마침 같은 숙소에 투숙하던 독일인들의 파티에 초대되어,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파티는 늦은 저녁시간에 ‘이 칸 바카르’(숯불 생선구이)와 ‘빈땅’(발리 맥주)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난 발리 병원으로부터 알코올 금지령이 내려졌고 콜라에 취한척하며 그들과 어울렸다.
나에겐 살짝 힘든 시간이었지만 여행을 통해
새로운 만남과 경험들로 인한 즐거움은 아픔마저도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LOMBOK
화장지가 없다!
http://www.lombok-network.com
(롬복의 기본정보를 볼 수 있는 사이트)
http://www.wannasurf.com/spot/Asia/Indonesia/Lombok/index.html
(롬복의 서핑 포인트)
발리에서 마지막 날 새벽까지 달린 우리는 다음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우리의 두 번째 목적지인 ‘롬복’으로 가기 위해 힘차게 공항으로 향했다.
하지만 공항에서 우리가 탈 비행기를 보는 순간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이게 과연 날아갈 수 있을까?
오래된 영화에서나 보았을법한 두 개의 프로펠러가 달린 구형 여객기가 있었다.
왕복 rp350,000의 나름 럭셔리한 가격의 비행기였는데 말이다.
조그만 물과 초코파이 비슷한 정체불명의 스낵… 환각의 쾌락을 느끼게 하는 기름 냄새…
달팽이관을 마구 흔들어대는 소음…. “이거 날 수 있겠지??”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하지만 떴다.
이 비행기는 떴다!
좀 불안했던 비행기였지만 그래도 분명히 하늘을 날아 우리를 롬복으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롬복의 ‘SELAPARANG’ 공항은 한산했고 긴장이 풀려, 새로운 곳에 영역표시로 할 겸 냅다 화장실로 달렸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볼일이 너무 급한 나머지 휴지 사는 것도 잊은 채 화장실로 달려간 나는 절규하고 말았다.
좌변기 왼쪽에는 애꿎은 샤워꼭지만 달랑 달려있었고
휴지는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발리는 관광지이며 힌두이즘 지역이었던 반면에
이곳 롬복은 철저한 무슬림들의 지역이어서 화장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왼손을 이용해 물로 닦고 샤워기로 손 씻고… 뭐 대강 그런 시스템이었다.
아무리 경험과 배움이 좋지만 차마 손으로 닦지는 못하겠어서
복통을 달래 가며 다시 밖으로 나가 화장지를 사고 롬복에서의 영역 표시를 훌륭하게 마쳤다.
공항입구에는 우리의 롬복 가이드가 되어 줄 ‘아리(발리의 친구)’의 친구이자
우리 숙소의 주인집 아들 ‘지지’가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왠지 동네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게 고급스러운
TOYOTA INNOVA를 타고 공항을 서서히 빠져나왔다.
롬복이나 발리는 주유소 이외에도 휘발유를 구하기 아주 쉬운 시스템을 하나 가지고 있다.
동네 어귀나 길가에 조그만 가게들에서 너도 나도 휘발유를 병에 담아놓고 팔고 있다.
우리도 마침 연료가 떨어져 그런 셀프주유소(?)를 이용한 후 열심히 남쪽으로 향해 달렸다.
롬복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1950년대 이전의 한국을 보는듯한 느낌도 든다.
곳곳에 마차, 허름한 장터 그리고 초가집들… 그냥 정겨운 우리의 시골의 냄새가 마구 풍기는 그런 동네였다.
두 시간여를 달려서 롬복의 최남단 꾸따(발리에도 꾸따가 있지만 여기에도 꾸따가 있다.)에 도착하였다.
야자나무 무성한 열대 우림과 모래언덕의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넘어 드디어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완벽한 파도가 있는 발리에서 또 새로운 경험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LOMBOK - G`DAY INN
롬복의 꾸따 메인 스트릿에 있는 ‘굿데이 인’ 저렴한 숙박비에 비해 비싼 식대.
결코 싸지만은 않은 곳이었지만 너무나 친절했던 주인아주머니와
까불거리는 아들 ‘지지’와 ‘꼬망’ 그리고 무뚝뚝한 주인아저씨.
이렇게 정겨움이 느껴지는 가족들의 틈에서 우리는 1주일을 지내게 된다.
숙박비는 하루 rp70,000 정도. 조그만 선풍기와 침대 그리고 모기장이 우리에게 주어진 편의시설이었다.
무료로 제공되는 아침밥은 토스트와 떼(TEA)또는 바나나 펜케익이었고,
점심이나 저녁은 rp10,000~rp20,000 정도로 해결 가능하며 빈 땅(BINTANG)은 발리와 같은 가격 rp11,000였다. 그리고 주요 교통수단인 스쿠터는 하루 rp20,000에 빌릴 수 있다.
LOMBOK - INSIDE GRUPUK
롬복에서도 우리 여행의 중심은 서핑이었다.
꾸따에서 동쪽으로 약 30분 정도 이동하면 노보텔(NOVOTEL) 리조트와
몇 개의 해변 그리고 야자나무 숲을 지나면 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쳐져있고 통행세(외국인 서퍼들만 낸다.)
를 내야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마을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캡틴 보니’의 배를 타고 랍스터 양식장을 빠져나가 20분 정도 더 가면
INSIDE GRUPUK
이라는 곳이 있다.
대부분 로컬 서퍼들과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서핑을 한다.
이곳의 특징은 리프 브레이크이지만 그다지 날카롭지 않은 산호지대에
해조류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서 바닥이 크게 위험하진 않다.
그리고 파도는 사이즈에 비해 힘이 좋은 편이고 부서짐이 많이 느린 편이라
테이크 오프 할 때 좀 늦었다고 생각해도 잘 박히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거의 하루에 한 번씩은 들렸다.
거리상 제일 가깝고 편하게 서핑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에 자주 갔었던 곳이다.
LOMBOK - MAUI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롬복의 PIPELINE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힘 좋고, 질 좋은 파도가 자주 오는 곳이다.
꾸따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LOW TIDE(간조) 시간에 맞춰 한 시간 가량을 오토바이로 달렸다.
숲을 헤치고 꼬불꼬불한 산을 넘어 허름한 시장도 지나고,
흙먼지 날리는 길을 달리고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해변에는 어설프게 오토바이를 파키르(Parkir:주차, 인도네시아어.)할 수 있는 자리가 있고
아기를 안고 있는 아주머니와 꼬맹이들이 서퍼들을 상대로 야자열매, 콜라, 물, 구당 가람을 팔고 있다.
200609 / LOMBOK / VILLAGE
해변 가운데서 거의 포인트 브레이크처럼 부서짐으로 해변의 왼쪽 끝부분에서 출발하여 빙 돌아 들어가야
가운데 있는 포인트로 쉽게 진입할 수 있다.
마침 파도가 적당히 헤드 하이 정도에 사람도 많이 없었고 이 정도면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
냅다 들어갔는데… 좌절이다.
너무 쉽게만 서핑을 했나 보다. 강한 조류에 계속 밀려서 라인업까지 20분 넘게 걸려서 나간 것 같다.
덕다 이브(Duck Dive:서퍼들이 파도를 뚫는 기술)에 덕다 이브를 반복하고,
계속해서 밀려 나가고 또 밀려 나가고…
그렇게 라인업에서 숨을 고르며 몇 개의 파도를 타고는 지쳐서
그만 철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너무나 멋있고 좋은 곳이지만 나한테는 아직 버거운가 보다.
하와이의 진짜 파이프라인은 언제 들어가 보려는지….
롬복은 전체적으로 서핑만을 위한 공간이라고 봐도 무관할 것이다.
이곳들 말고도 DESERT POINT나 에카스의 인사이드&아웃사이드 등 너무나 많은 포인트들이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때문에 롬복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기보다는
몇 군데 포인트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나이트 라이프라고는 몇 개의 와룽(규모가 작은 식당을 말하는 인도네시아어)과
그곳에서 보여주는 오래된 서핑 비디오. 그게 전부다.
어떤 이들은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는 그런 작은 섬이지만,
대자연의 포근함과 진짜 열대 낙원의 느낌을 느끼고 싶다면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고 생각된다.
길게 뻗은 하얀 모래의 해변과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막아주는 야자수의 그늘과 선선한 바람,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친절한 사람들이 있는 숨겨진 섬이자 지상낙원.
그곳이 바로 롬복(LOMBOK)인 것이다.
200609 / LOMBOK / REST IN LOMBOK
LOMBOK - 에필로그
롬복에서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고물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FATBOY SLIM’과 천정에 붙어있는 GECKO(도마뱀붙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이슬람 사원의 음악소리는 하나로 뒤섞여 묘한 소리를 만들어냈고 그렇게 우리는 바다에 비치는 달빛과 함께 취해가고 있었다.
예전에 써 놓았던 여행기를 재 구성 하였습니다.
사진이 많이 분실되어서 일부 복구된 사진만 사용 했네요.
2006년의 여행기라, 지금은 많이 바뀐걸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