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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기씨 Jul 27. 2024

암 하나로 안.되.나.요?

“언니~ 컨디션 괜찮으면 바람도 쐴 겸 나가서 밥이나 먹고 와요~~”

“그래~! 어디로 갈 거야~?”     




수술을 하고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친한 동생이 밥 먹으러 가자고 전화가 왔다.

수술 날짜를 잡고 몇 달 동안 불안했던 것에 반해, 전이 없이 수술로 간단(?)하게 끝내고 사흘 만에 퇴원하여 집에서 편하게 쉬고 있었을 때였다.

 암 진단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몸 보신해야한다며 밥 먹자던 언니들에게는 ‘괜히 나가서 코로나 걸리면 언니나 나나 마음 불편하니 다음에 가요~’ 라며 거절 한 게 무색할 정도로 선뜻 대답을 하는 이유는 단지, 내가 동생들에게는 좀 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약속한 날에 동생을 만나, 동생이 운전하는 차로 편하게 이동하여 미리 예약해둔 한정식 집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후식을 즐기며 밀린 수다도 떨고 기분 좋게 집으로 왔다.

그리고 며칠 뒤, 목구멍이 따끔한가 싶더니 온몸이 불덩이처럼 열이 났다.

암 수술 때 보다 더 아팠다. 코로나 양성이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코로나 증상은 바로 사라졌지만 후각은 두 달 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같이 밥 먹은 동생은 아무렇지 않았었다.    



      

돌아올 생각이 없는 후각에 비해 몸의 전체적인 컨디션은 점점 회복이 되고 있었다.

‘수술도 잘 되었으니 슬슬 취업준비를 해볼까?’ 준비해 두었던 자격증도 써먹을 겸 구직사이트를 뒤져보니 대부분의 사회복지사 구인광고에 실제 운전 가능자 라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앗차! 면허증 보유만으로는 안 되는 거구나...20년 장롱면허를 어떡하나...?’고민하던 차에 엄마의 절친이 타시던 차를 판다고 하셔서 구입을 했다.

아주 가끔만 운전을 하던 초보였기에 아버지께 1주일정도 연수 받고 혼자서 차를 끌고 왔다.(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그리고선 운전 감각을 잃으면 안 된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드라이브를 나갔다.

교통량이 많은 곳으로 가기엔 아무래도 무서워서 교통량이 많지 않은 정서진으로 차를 몰았다.

가는 도중에 공항방향으로 가다 도로 나오기도 했지만 뒷 유리에 붙여놓은 '초보운전' 스티커 덕에 ‘뭐 어쩌라고!’ 배짱이 두둑했다.

그러다 어느 날, 드라마 내 이름은 우영우에서 나온 낙조마을을 보고서 ‘그래, 저거야! 저길 가봐야겠어!’ 마음을 먹었다.

다음날, MT 가는 딸을 집결지까지 픽업해주고 바로 낙조마을로 향했다.

그렇게 강화도를 내 차로 운전해서 처음 가보게 되었는데 약간의 긴장감은 있었지만 혼자 여유롭게 드라이브 하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강화도에 도착하니 드라마에서 나온 낙조 마을은 없었지만 일몰 구경을 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곳이 있었다.

 느긋하게 바다 구경하고 바다를 배경으로 자동차 광고 같은 사진도 찍으며 여유를 즐겼다.

하지만 낙조까지 기다리기엔 체력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이른 오후쯤 집으로 향했다.

네비를 따라 초지대교를 건너 서구 쪽으로 넘어오는 길이었다.

 시속 50km로 천천히 가고 있는데 큰 사거리 한참 전에서 신호가 주황색으로 바뀌었다.

천천히 브레이크를 잡으며 정지를 했다. 그리고 ‘빠앙~~~~!!’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고, 정지선에 맞춰 정차 해두었던 차는 횡단보도 위로 이동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룸미러를 보니 덤프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려 내 차로 걸어오고 있었다.

차를 가져온 지 한 달도 채 안된 어느 날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한지 넉 달 만에 다시 입원을 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들이 받힌 사고라 목과 허리의 통증이 제법 심했다. 다람쥐 쳇 바퀴 돌 듯이 하루 세끼의 식사와 오전 오후의 치료를 받으며 2주간 한방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다행히 골절은 없었다.)

입원기간이 끝나도록 허리 통증이 낫지 않아 결국 통원 치료를 하였고 나의 백수기간은 자동으로 연장 되었다.

그러는 동안 식구들은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자기 할 일들을 알아서들 하고 나중에는 잔소리조차도 점점 아끼는 사람들이 되었다.

두 어 달의 통원을 하는 동안에도 나의 허리통증은 답보상태였다.

괜찮다 싶어 운동하러 다녀오면 통증이 도져 며칠씩 요양을 해야 했다.

한방병원에서의 통원 치료만으론 더 이상 호전을 기대할 수 없어 신경외과로 옮겨 꼬리뼈를 통한 신경차단 주사를 3회 맞고서야 허리 통증이 좀 잡혔다.

그러는 동안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있었다.

가을엔 매복 사랑니를 수면마취로 발치하기로 예약이 되어있었다.

외가쪽 유전을 이어받은 개구(開口)장애가, 뒤늦게 질환인 것을 깨달아 오래전부터 진료를 받고 있었는데 진료 기간에 비해 개구량 느는 속도가 미약해서 수면으로 사랑니를 발치하는 것이 어떤지 고민할 때 암 수술을 먼저 하게 되어 발치를 미뤘던 터였다.

허리 통증이 잡히고 몇 주 뒤, 당일입원 당일 퇴원으로 매복 사랑니 발치를 하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오가며 진료를 받는 동안 다시 겨울이 왔다.

암 진단을 받은 후 1년이라는 시간이 정신없이 요란스럽게 지나갔다. 백세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었는데........   


“암 하나로는 안되는거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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