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 이튿날

by 이숙자

낯선 잠자리라서 그런지 새벽에 눈이 떠졌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듯해 확인하려고 커튼을 열었다. 창 밖 풍경을 바라보니 선명하지는 않지만 흐린 하늘에 바다가 보이고 야자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낯선 풍경과 마주하니 내가 왜 여기 있을까,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아, 그래 여행 왔지. 마음이 움직이니 몸도 움직여지고 이곳에 내가 와 있구나.


삶이란 때때로 예기치 못한 일과 마주 한다. 얼마 전 까지도 내가 제주에 오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일 일도 모르고 산다는 말이 맞다. 삶도 내가 정해진 데로 살 수 없는 것이다. 한 세월을 바람에 밀려 여기까지 흘러 흘러 나는 어느덧 황혼이 되어 있다.


바람이 할퀴간 삶의 자리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또 묻는다.


여행을 오면 편히 쉴 수 있는 조용한 숙소, 맛있는 음식 가끔은 그런 호사를 누리는 게 여행이다. 예전에는 그러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자식들 덕분에 지금은 호사를 누린다.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보상을 한다. 함께 힐 사람이 있어 얼마나 축복인지, 우리는 날마다 눈으로 확인은 못하지만 미세하게 변해 가고 있다. 세상에 남아 있을 시간도, 건강도 어느 날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누릴 수 있을 때 누려야 한다.



맛있는 음식 먹고, 예쁜 카페 가고, 차 마시고, 사진 찍고 그게 요즘 여행이다.


세쨋 딸이 예약한 숙소는 아담하고 고급진 호텔이다. 조식은 맛있는 음식이 가득이다.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서서히 즐기면서 음식을 먹으며 여유를 부린다. 곁에서 아기를 데리고 온 여행객도 좋아 보인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고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다. 이런 날은 걷기보다는 조용히 쉬는 시간이 더 어울린다.


세쨋딸과 손자 둘과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 새벽같이 출발해서 제주에 도착했다는 막내 딸 톡이 왔다. 공항에 가서 막내딸을 픽업해서 둘째네 숙소로 갔다. 집에서 쉬면 편하련만 한 걸음에 제주로 달려와 주는 사위와 딸, 손자들, 온 가족이 여행지에서 만나니 반갑다.


점심 먹고 바다에 나갔다. 사람들은 참 바다를 좋아한다. 왜일까? 마음이 답답할 때, 또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 이유가 많다. 둘째 딸네 숙소는 함덕 해수욕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슬비는 내리고 바람은 여전히 많이 불고 있었다. 여행이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가족이 모인 자리여서 인지 모든 것이 편하고 즐겁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가는 곳마다 조용해서 좋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사색할 여유가 없다. 나는 겨울여행의 쓸쓸함을 즐긴다. 바다의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남편은 곁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 수가 적은 남편의 생각을 도통 알 수가 없다. 어느덧 찾아온 노년의 삶, 이 시간들이 얼마나 남았을까 싶어 쓸쓸함을 느낄 것이다.


지구라는 별에서 살아온 나는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말없이 파도를 바라보면서 살아왔던 날들과 살아갈 날에 대한 무수한 생각들이 마음속을 헤집고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곁이 쓸쓸하지 않도록 남편과 자식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는 기쁘고 행복하다. 앞으로 찾아 올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이라는 날이 나에게는 찬란할 뿐이다.


힘덕 해수욕장에서

사람들은 모래 위에 하트와 이름이 써 놓았다. 자기 마음에 담고 있는 염원의 흔적일 것이다. 나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어 남편에게 건네주면서 "당신이 제일 하고 싶은 말 한번 써보세요?" 남편은 막대기로 가족 사랑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남편의 염원은 늘 '가족 사랑'에 있었나 보다. 그래서 제주에 한 걸음으로 달려왔다.

남편이 모래 위에 쓰고 있는 가족 사랑


우리는 추위를 피해 커피숍에 들어갔다. 바닷가 보다 오히려 커피숍에 사람이 더 많다. 이건 순전히 날씨 탓이다. 창가에 커피 한잔 놓고서 한 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젊은이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아마도 파도치는 바다에게 묻고 싶을 것이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인생은 찰나의 바람인 것이라는 것을... 돌아보니 바람 같은 것이 인생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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