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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자 Sep 18. 2019

"당신 마누라 잘 만났지?"

50년간  제사  모신 이야기

추석이 오기 며칠 전이었다.

"여보  추석 전날 큰집에 가야 해요?" 라며 나는 남편에게 말을 건다.

"  가야지"

그렇게  대답하는 남편이  좀 야속하다.  나는 엊그제  작은 사고로 몸이 좀 안 좋은 상태이다.  결혼 후  한 번도 명절 전에 큰집에 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지난 설 한번 딱 빼고는,  


안 되겠다 싶어   추석 전에  작심을 하고 남편에게 대들었다.

 

 " 나도 이제 사위, 딸. 손자가  명절에  집에 오는데  큰집에 제사 음식 만들러 가는 일이 가 당하기나  

요?   이젠 명절 전날은 큰집엔 가지 않을 거예요"


 남편에게 선언을 하고 큰댁  장 조카에게도 전화를 해서 명절에 큰집 가지 않을 거란 선언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이제는  나는 명절 전날 큰집에 가서 음식 만들기는 하지 않는다.  남편에게도,  큰집과 선언을 했다.  나는 결혼 50년 만에  명절 음식 만드는 일에서 해방이 됐다. 마음이 한결 가볍다.


나는 딸이 넷이지만 둘은 해외에  나가서 살고,  서울살고 있는 둘째하고 막내만  명절에 내려온다.  올해는 둘째 딸 아들이 고3 막바지라서 내려올  형편이 아니다.  막내는 휴가차 여행 떠나고,  명절 전날  큰집에 안 간다고 약속은 했지만 아이들이 오지 않으니 무료하고,  큰집 형님이 몸이 아프니 피할 수도 없다.  몸이 고단해도 마음이 편한 게 좋았다.  큰댁엔  조카며느리 혼자서 제사음식을 하니 신경이 쓰인다.


 명절이 오면 큰댁에 가는 게  몸에 익숙한 탓일까?  절에 안 간다고 약속은 했지만 올 추석에  큰집에 가고야 말았다.  형님이 몸이 불편해서 갔는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딸도 사위랑 왔고  하나뿐인 아들의 아이들,  딸이 음식 만들기를 도왔다.  이젠 정말  명절엔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네 가족 속에 우리 부부가 있으니 타인처럼 낯설어진다. 전에 느꼈던 기분과는 다른.


                                                                                

                                        항상 정성스러운 음식이 푸짐한 제사상


                                                                                                                              

우리 세대는 결혼하면 시댁 풍습에  따라 거절할 수 없는 며느리 몫이 있었다. 그렇게 살아야 했던 시절이다. 결혼하고 보니 시댁은 제사가 일 년에  열한 번을 지내고 있었다. 나는  결혼 50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제사 음식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했다. 음식도 간단히 준비하는 게 아니었다. 많은 친지들이 모이고 봉지봉지 손에 들려 보내야 하는 음식은 많이 해야 했다.


 시댁은 형제가 오 남매이고 아들 삼 형제.  딸이 둘이다.  시누님 둘은 연로하셔 돌아가셨고, 남편은 둘째 아들이며 큰집은 종손이다. 근래에는 친족들도 돌아가시고 제사에 창여하는 숫자가 줄어 조금은 간소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음식을 많이 했다. 


나를 더 많이 힘들게  했던 것은  남편의 가치관과  태도이다. 남편은 가족 형제의 화목이  살아가는 첫째 덕목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다. 어떤 때 보면 마누라보다 큰집 행사가 우선이다. 자기중심이 확고해서 요지부동이다.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마치 종교행사를 치르듯이 하는 시댁 관습이,  며느리들은  견디기 힘든 문화다.


시어머니 살아계시고 아이들 어려서는 정말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았다. 여자들이 일하는 걸 당연시 아는 세대인 남편과 시숙, 시동생이 때론 야속하고 섭섭했다. 그들 생각은 여자는 오로지 집안의 관습을 잘 지키는 주부의 역할만 당연시 생각했다. 어른들이 살아 계실 때는 추석과 설에 점심을 거의 사오십 명씩 먹는 게  일반적이었다.  


친척들 산소가 큰댁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성묘 갔다 찾아오는 외가댁 식구, 어른에게 인사차 오는 친척들,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  자연스럽게  힘든 건 며느리들 몫이었다. 그래도 당연히 받아들이며 묵묵히 며느리 몫을 해내는 게 우리 집 며느리 들이었다.

                                                                                    

                        술잔을 올리는 둘째 아들 막내아들 언제나 엄숙한 자세로 제사를 지낸다


                                                                                                                           

어느 날 가족회의를 하고, 정말 알지도 못하는 조상의 제사는 묶어 명절에 지내고, 시할아버지 제사는 부부와 함께 묶고, 시어머니 시아버님만 각각 지내기로 합의를 했다. 그래도 일 년이면 다섯 번,  제사 지내다가 일 년을 다 보내는 듯한  압박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맏며느리인 형님이 연로해서 이제는 아프다. 여자인 나로서도 그 삶을 되돌아보면 연민이 느껴지며 안타깝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제사 지내고 큰며느리 역할을 하느라 인생을 다 보냈을까?  준비해놓은 걸  가서 일만 하는 나도 힘드는데,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여  더  많이 내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제사란  돌아가신 분에 대한  감사와 추억,  가족 간에 화목과 뿌리 의식을 느끼도록 하는 우리 고유의  따뜻한 문화이다. 중요한 것은  남자들도 역할 분담을 하고 서로를 위하는 배려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오랫동안 이어왔던 시댁 제사 음식은  여자들끼리  역할 분담이 잘되어 있다. 나는 전을  부치고 나물과 탕을 한다. 나머지 떡과 생선은 형님 담당, 막내는 갈비나 전을 함께 할 때도 있다. 우리는 일하는 것 가지고는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서로를 배려하고  따뜻한 정이 남다른 형제애를 가지고 있다. 조금 서운한 면이 있어도 이해하고 소중함이 더 크다는 생각을 한다. 가족들의 화합을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집안 문화다.


  여행도 같이 하고 생일이면 식사를 같이 하는  우애가 각별한  관계이다.  어느 날 나는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물어보았다.  


 " 여보, 이 집 문 씨 남자들  마누라들  잘 만났지?

  불평 없이  의좋게  조상을  잘 모시고 있으니,  남자들은  고마운  줄 아세요."  

 고 말하니, "그렇지"라고 남편은 인정을 하며 흐뭇해한다. 형제들 조상을 잘 모시고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그들의 가치다.


 생각하면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만나 평생을 같이 하고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소중함에  마음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나이 들어 이별할 날이 가까워  오는 탓이기도 하다.  나는 젊어 철이 없을 때는 불만이 많기도 했다.  큰댁은 시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유산을 거의 다 주고 가셨다. 


 큰 아들이니까  제사를 해야 하고 큰집이 잘 살아야  집안을 잘 이끌어 간다는 옛날 어른들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림없는 말이지만, 부모님 돌아가신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누구 하나 섭섭한 표현을 안 한다. 형제가 잘 지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젊어서는 제사는 내 몫이 아닌 듯한 생각뿐이었다. 항상 주변 어른들 강요에 의해 큰 며느리 애쓴다고 집안 행사만 있으면,  둘째인 나에게  큰집에  빨리 가서 제사 도우라고 독촉하는 시누님도 싫었고, 스트레스  많았다.  시어머니가 두 사람 같았다. 큰 며느리가 해야 할 몫인데 내가 왜?  하면서 마음으로 거부를 하니 더 힘들다는 생각이 마음 안에 떠나지를  않았다. 


 남편도 내 편이 아닌 남의 편이라는 생각에  항상 섭섭했었다. 큰집에 가서 일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오랜 세월  가정에 힘든 일을 해온 어머니나 형수만 보고 살아온 남편은 여자가 시댁 일 하는 걸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 모습만 보아온  영향이지 않을까?  하고  이해도 해 보았다.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는 항상 강요와 의무를 주장했다. 그러한 점들이 싫었다.  


나는 결혼 전 친정에서는 아버지가 셋째 아들이라서 제사도 없고 손님이 드나들지 않는 단출한 집안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복잡한 시댁과의 문화적 차이가 컸다. 그걸 적응하는 시간이 힘들었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을 하고 살도록 되어있다.  


결혼 생활에 적응하게 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화게 되었다. 자신이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생각으로  나를  나답게 살게 했다.  내가 살아내야 하는 내 몫의 삶의 자리를  알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살아가야  할  길이 있고 그 길을 살아 내야만 한다. 


 이제는 나이가 많아 일을 놓아야 할 때이지만, 아직을 일할 수 있어 다행이다. 가족으로 살아온  세월만큼 켜켜이  쌓아온 정 들 이 두텁다.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도 외롭지 않아 좋다.


 내가 만든 음식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멀리 있는 가족들 사촌들까지 모두 모여 명절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다. 조상을 같이 모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든든함도 좋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을 하게도 한다. 


가족이 명절을 잘 지내려면 우선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여야 한다.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담당하고, 여자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인정해 주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존중이 우선이다.


시대가 변했다. 여자들도 사회에서 당당히  직업인으로 할 일을 하고 있다. 여자들 에게예전 관습대로  명절 음식과 많은 가사 일을 맡기는 일은 옳지 않다. 남자들이 변화해야지, 가정에 평화가 오고 여자들도 명절 증후군이란 말이 사라 지리라 믿는다.  이토록 힘들고 복잡한 제사 문화는 우리 대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대교체에 따라  자꾸만  변화되는  세상의 흐름은 막을  수가 없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실 속에  복잡한 제사가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가능한 제삿날은  모여  정성스럽게 먹는 음식이라도 나누고  고인을 추억을 하며  형제의 정을 나누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가져 본다. 그게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는 도리이며  의미이기도 하다. 제사를 지내는 날은  죽은 사람 이름으로  산 사람들이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파티라는 생각을 하면 어떨까?


                              201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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