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22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 50주년 금혼식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남편은 항상 이벤트에 약한 사람이다. 살면서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이나 돌아오면 스스로 챙기는 일이 거의 없어, 때론 많이 섭섭하기도 하다. 언제나 조르고 졸라 겨우 외식 한 끼, 자발성이 없는 외식은 맛이 있을 리가 없고 기분 또한 별로다. 어느 해부터는 마음을 비웠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결혼한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50년 이란 세월이 믿어지지 않는다. 앞만 보고 살아낸 시간들, 딸 넷 낳아 기르고 교육해 결혼까지 다 했다. 무거운 짐을 다 벗어 놓은 듯한 가벼움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가 된 느낌이 들었다. 삶이란 것은 끓임 없이 책임을 어깨에 메고 앞으로 걸어가는 방랑자와 같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었다.
부모란 자식에게 '베이스캠프''라고 생각한다. 세상 살다가 힘겹고 막막할 때 찾아와 쉴 수 있는 곳, 남편은 지금도 항상 긴장을 하고 산다. 자식 중에 누구 하나라도 어항 속 물고기가 산소가 부족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올 때를 대비해 산소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부모라 고 말하면서, 거기에는 자기희생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자기를 내어 주는 희생이 있을 때 감동이 된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생각일까?
결혼기념일이 지난 며칠 후 둘째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 엄마 아빠 아무 일 없으신 거죠? 나 제주도에서 5월 16일부터 행사하고 19일 끝나는데 여행도 하고서 쉬기도 하고 맛있는 것 먹고 오게요"
그렇게 시작된 제주도 여행, 여행의 들뜸이 단풍잎처럼 붉게 마음을 물들인다. 준비하는 과정부터 설렘으로 즐거워 기분이 올라가면서 들 뜸의 시작이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도록 주황색 남방도 하나 준비하고, 남편의 옷도 멋진 걸로 골라 챙겨 넣는다. 선글라스와 모자까지도 잊지 않고 가방 안에 넣고 무얼 더 챙길 게 없나 점검을 한다. 이런 일련의 준비과정부터가 여행의 맛을 느낀다. 호텔과 콘도에서도 머물 거란 말에 음식도 간편하게 챙겼다.
둘째 딸과 함께 해변 도로 드라이브
군산에서 유일하게 비행기로 갈 수 있는 곳이 제주도다. 군산공항 까지는 옆에 사는 동생이 태워다 주었다.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모두 가족이나 친구끼리 떠나는 여행이라서 모두가 약간의 기분 좋은 여유가 느껴진다.
5월 19일 날이다. 한 시간 남짓 비행시간이 걸리는 짧은 거리다. 제주도에 도착하고 수화물을 찾고 있는데 " 아빠 엄마 나야 짜잔" 하고 서울에 있는 막내딸이 나타났다. 어찌나 반가운지, 우리와 비행기 도착시간을 맞추어 왔다. 우리를 케어하기 위해 오게 된 것이다. 둘째는 행사 중이라 우리를 케어할 시간이 안된다. 도착시간은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군산은 날씨가 멀쩡했는데 제주에 오니 바람이 몹시 불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역시 제주는 바람이 많은 도시다. 차를 렌트해서 둘째 딸이 기다리는 중문 단지 롯데 호텔 쪽으로 달렸다. 벌써 어둠이 내려 캄캄했고 창밖 풍경을 보이질 않는다. 막내딸이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다. 나이가 들어가니 자꾸만 낯선 곳에 가면 두려움이 오게 된다. 그래서 여행은 젊어서 다니라고 했나 보다. 젊음은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열정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다. 젊음이 부럽다.
신라 호텔에서 아빠와 막내딸
호텔 주면 식당에서 둘째 딸은 반갑게 만나서 주문해 놓은 전복 돌솥밥을 맛있게 먹고 롯데 호텔로 들어갔다. 넓은 로비는 화려하고 멋진 곳이다. 중국 관광객도 더러 보인다. 호텔 내부는 깨끗하고 넓은 방을 배정받아 4인 가족이 함께 잘 수 있는 방이어서 쾌적했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좋은 숙소에서 잠을 자면서 여유를 즐기고 밥걱정하지 않는 것도 마음이 여유롭다. 주부는 항상 끼니 걱정을 날마다 달고 살아야 한다. 남자들은 모를 거다. 조명이 은은하고 창밖 멋진 불빛 아래 보이는 풍경이 운치를 더해 준다. 따뜻한 차 한잔을 하면서 " 와아~ 딸들과 여행을 왔구나, 호텔방에 앉아 있게 되니 실감이 난다. 도란도란 지난 이야기꽃을 피우는 이 밤도 괜찮다.
예전 시어머님 살아 계실 때, 남편에게 아들이 없다고 노심초사하시며 어느 날은 나에게 " 얘야, 아들 낳기 힘들면 다른 곳에서라도 낳아 온다 더라" 기막힌 아픈 말을 듣고 ' 까짓 거 죽기 아니면 살 기지' 하는 마음으로 낳은 지금의 막내딸,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보물 같은 딸이다. 결국 시어머님 권유 덕에 낳은 딸 덕을 우리가 본다. 큰딸과 셋째는 외국에 나가 살고, 둘째 딸은 항상 바쁘니 막내딸이 우리 집에서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해결을 많이 해주는 역할을 해 낸다.
나는 딸은 넷 낳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다. 마음속으로 ' 딸만 낳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멋지게 키울 거란 다짐을 했었다 다'. 아이들 키울 때 명절에 큰집에 가면 삼 형제 아이들 사촌들이 다 모였다. 예전 어른들은 아들만 귀하게 여기고 딸은 반기지를 안 했다.
그때 받은 서러움과 소외감이 언제나 내 가슴 한편에 남아 내가 딸들이라도 멋지게 해 놓을 거란 다짐을 했었다. 삶에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게 아니다.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 딸들 모두 잘 자라 주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다음날 아침 흐리고 바람이 불며 날씨가 좋지가 않다. 밖에 나와 산책을 했다. 호텔 뒤편은 예쁜 나무들도 심어놓고 산책길을 근사하게 꾸며 놓았다. 걷기만 하여도 기분이 좋아진다. 잔잔한 바다가 보이는 곳은 평화롭고 고요하다. 푸른 바다를 보니 제주도에 왔구나 실감을 하게 된다. 야외 수영장을 가기 위해 롯데 호텔을 왔는데 날씨가 흐르고 바람이 부니 수영장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썩 내키질 않는다. 수영장엔 몇 사람뿐이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하귀 애월 해안 도로 드라이브를 했다. 끝없이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차를 타고 달리는 기분은 상쾌하다. 제주도는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기운이 한가롭고 여유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쉬기 위해서 제주도를 찾는듯하다. 바쁘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빼어난 제주의 바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는 멋지다. 가끔 예쁜 카페와 맛집도 있고 정박해 놓은 작은 배들도 그림 같다. 도로 옆에 펼쳐진 하얀 풍차는 다른 지역에 온듯한 기분이 든다. 가다가 그림 같은 곳은 사진도 찍고 바다를 많이 바라보았다.
해변도로 카페들
밤에 저녁을 먹기 위해 예약해 놓은 신라 호텔에 일찍 돌아왔다. 낮에 바람을 어찌나 맞았는지 따뜻한 곳에서 편히 쉬고 싶었다. 신라호텔은 건물아 나지막하고 아늑하다. 실내장식도 모던 스타일로 깔끔하고 우아하
다.
여기저기 인증숏 사진을 찍고 뒤편 풍광을 구경하게 위해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 이런 곳은 미끄러워 조심해야 해요" 말을 하는 순간 앞으로 '꽈당'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계단 하나를 헛디뎠다. 뒤따라오던 딸들도 놀라 " 괜찮으세요?" 물어오고 옆 사람들도 "어쩌나" 하고 놀란다. 나는 손을 짚고 넘어지고 안경 밑 이 따끔거렸다. 눈 밑에 상처가 나고 남편도 무릎에 상처가 조금 났다. 일어나면서 놀라고 쑥스러웠다.
호텔은 의무실이 있다. 그곳에 가서 얼음찜질하고 약 바르고 응급처치는 했다. 자고 나면 괜찮아야 하는데 약간 신경이 쓰였다. 애들이 "애고 큰일 날 번 했네, 다행이다." 젊은이들이 어른들 모시고 여행하는 것이 쉽지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나는 항상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씩씩한데, 나이 듦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순발력이 떨어짐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의무실에서 한참을 쉬고 예약된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정말 많다. 세련된 차림으로 가족끼리, 연인끼리 모두가 맛있는 걸 먹고 여유를 즐긴다. 아주 고급 진 음식들이 많다. 여기 온 분들도 다 사연이 있을까?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곳에 오는 것은 몇 번뿐이다.
그동안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이 맛이 있다. " 아빠 엄마 결혼 50주년 축하하고 저희들 이렇게 잘 키워 주셔 감사합니다." 남편은 목이 메는 듯하고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막내딸이 " 오늘 저녁은 내가 밥 살게요." "그래, 딸들 멋지다."
마음이 푸근해지며 행복하다. 잘 자라줘서 고맙고 모두가 결혼했다. 자기 삶을 잘 살고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감사할 뿐이다. 사람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살면은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는 교훈이 맞기는 맞나 보다. 맛있는 것 먹고 좋은 분위기에 않아 있으려니 그동안 쫓기고 바쁘게 살아온 날들에 대한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숨 가쁘게 살아온 날들이었다.
식사 후 내비게이션을 켜고 남원읍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는데 길은 어둡고 찾는 길이 쉽지가 않다. 길에는 가로등도 없다. 남원읍은 시골이다. 얼마 후 도착한 곳, 길거리에 레온 사인 글씨로 '해먹 빌리지'라는 영어로 된 글씨가 반짝거린다. 특이하고 멋지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주인이 반갑게 맞아 준다. " 따뜻하게 불 넣어 놓았으니 편히 쉬시고 불편한 것 있음 말씀하세요" 하면서 내부 이곳저곳 사용 설명을 하고 돌아갔다.
제주 여행할 때 머물렀던 패션
내부는 아주 깔끔하고 멋진 구조다 소품 하나하나 모두가 세련되고 보기가 좋아 소장하고 싶은 욕구를 높여 준다. 예전에 딸 친구가 제주 한 달 살기 한집이라고 소개를 받았다고 한다. 침구도 호텔과 뒤떨어지지 않는 세련되고 깔끔함이 기분이 좋다. 부엌 싱크대를 열어 보았다.
'아니 세상에' 그 속에는 햇반이 여섯 개, 참치캔 5개, 국수 한 묶음, 먹다 남은 식용유, 진간장, 물 끓여 먹는 차를 남겨놓고 갔다. 다음 사람을 배려한 고운 마음이었다. 놀라웠다. 순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는 어느 곳에 가면 남에게 페가 되지 않으려 내 물건은 잘 챙겨 오고 깨끗이 비워 놓고 오는데, '다음 사람을 위한 배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구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순간이다. 상대의 마음에서 헤아려 주는 배려가 기쁨과 행복을 선물을 받았다는 기분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