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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자 Jan 25. 2020

부러진 손목으로 외손자 세명과 한 달 살기

외갓집은 마음에  고향 같은 곳

                                                                                                                                                                                                                                                                                                                                                                                                                                                                                                     

방학이 되면 중국에 나가 살고 있는 셋째 딸이 손자 둘과 함께 한국에 나온다. 작년에는 시댁인 분당에 더 많이 머무르고 군산에는 며칠만 다녀갔다. 이번 겨울 방학은 군산에 오래 머물 거란다. 얼마 전 나는 넘어지면서 손목뼈가 부러져 깁스를 했다. 외손자들이 군산 외가에 와서 한 달 살기를 한다고  한다. 조금 불편할 텐데  와서 도와준다고 하니 기특하기는 하다. 내가 더 힘들지 않을까 염려는 되지만 그래도 반가운 마음이 더 하다.


셋째 딸 큰 아들인 손자가 하는 말이 "이제 외할아버지 연세가 많으니 얼마나 오래 보겠어요"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찡해온다. 올해 나이 열여섯 살, 속이 깊은 애다.  


외갓집  이미지 사진

손자는 중국 중경에서 부모와 함께 살다가 지난가을 학기부터 청도에 있는 기숙 국제 학교로 진학했다. 벌써 부모와 떨어져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홀로 세상 속에 던져진 듯 마음이 안쓰럽다.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얼마나 두렵고 막막할까 여러 생각이 겹쳐온다. 사랑했던 자녀들도  언젠가는 부모와 떨어져 독립을 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게 삶의 순리다.


 둘째 딸 아들은 지난해 고3이라는 산을 넘고  올해 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수능 후 맘껏 놀고 싶을 텐데 할아버지  할머니. 사촌 동생들과 함께 보낸다며 함께 군산에 내려왔다. 모두가 추억을 만들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거라 한다. 조용했던 집이 북적북적 활기가 넘친다. 모름지기 집이란 사람이 다스려야지 사람이 없으면  쓸쓸함을 넘어 집이 생기를 잃고 만다.  


어리기만 했던 손자들이 훌쩍 자라 세상 속으로 나가고 있다. 힘들고 어려웠던 과정을 지나면서 인생의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려 한다. 이번 대학 들어가는 손자는 갓난아기 때부터 7년간 키워 서울 둘째 딸에게 보냈다. 세월이 정말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유치원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방학을 하면 손자들은 거르지 않고 외갓집인 우리를 찾아왔다. 모두가 힘들었던 일상의 나날들을  잠시  쉬려고  찾아온 그들에게, 외갓집은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들이 먹이를  얻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날갯짓을 하다가 멈추고 휴식을 위해 찾아온 둥지처럼, 지친  몸이 쉬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 가면  좋겠다.


갑자기 식구가 많아지니 식사 시간이  되면  정신이 없기는 하다. 내가 한 손을 쓸  수가 없어  음식을 제대로 못하니  인터넷  쇼핑으로 먹을거리 택배가 날마다 날아온다. 딸은 바로 즉석에서 간단하게  조리하는  음식을 주문한다.  처음에는 이상했으나 적응하니 그런대로 편하다. 때로는 음식재료를 사다가 한 손으로  좋아하는  닭볶음 탕을 해주면은 손자들은 "할머니표 닭 볶음탕 최고예요" 하고 먹으면 흐뭇하다. 더 맛있는  음식을  해주지 못함이  아쉽지만 다음으로 기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날들도  훗날 추억이 되리란 생각이다.


예전에  내 외가는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외갓집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늘 가볍고 기뻤다. 전주 경원동 골목길 돌아서면 기와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판자 울타리 곁 꽃밭에는 분꽃, 백일홍 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고 외할머니 삼촌들은  미소로 " 어서 와라"  반겨 주셨다. 변함없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던 기억들,  세상 속에서 긴장됐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내가  직장 생활을 하고 가족과 떨어져 자취를 할 때였다. 때때로 외로움이 밀려오고 겨울 날씨가 추워지면 사람이 그리워진다. 그럴 때면 외할머니를 가끔 찾아갔다. 언제나 반갑게 맞아 주며 " 어서 와 밥 먹어라"  밥때가 아닌 시간에 찾아가도 항상 방 아랫목 이불속에 묻어둔 밥에 김치는 머리만 잘라서 밥 한 그릇 뚝딱 먹고 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힘들었던 마음도 사그라들고  방 가운데 화롯불에 손을 녹이며 도란도란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외가를 다녀오면 세상을  살아낼 힘을 얻고 위로를 받았다. 옛날에는 밥솥도 없어 따뜻한 밥을 보관하지 못했을 때다. 그런데도 외할머니는 언제나  아랫목 이불 밑에  여분의 밥을 묻어 놓으셨다. 누구라도 찾아오면 밥을 주셨다. 그 시절은 배고픈 시절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야 할머니의 사랑이 전해 오면서 그리움이 절절 해진다. 옛날을 되리켜 생각하면  외가가 없고 외할머니의 사랑이 없었으면 사는 게 얼마나 춥고  삭막했을까 싶다. 외갓집은 항상 내 마음 안에 자리한 고향이었다.


지금 나는 외할머니와 친정엄마가 됐다. 딸과 손자들은 어디에서도  위로받을 수 없는 마음을 엄마와 할머니로부터 받기를 원하리란 생각이 든다. 딸도 낯선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사람은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위로받을 사람과 가고 싶은 장소가 필요하다. 내 기억 속에 추억이 켜켜이 쌓였던 외갓집을 그리워하듯  손자들과 딸에게 그리움을  가득 마음 안에 담아 가기를 소망한다.




언제라도 와서 쉴 수 있는 곳,  외갓집은 모든 사람 들  쉼터이며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내려오는  태고의 고향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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