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온 어느 날

눈이 많이 온 동지 날이다

by 이숙자

이른 아침, 남편은 서둘러 나를 깨운다. 오늘 건강 검진 예약해 놓은 날이다. 병원을 일찍 가야 밀리지 않고 끝낼 수 있다고 재촉을 한다. 때론 남편의 서두르는 성격 때문에 힘들 때가 있다. 사람이 혼자 살아도 힘들고 둘이 산다고 쉬운 일은 아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끼리 맞추고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자고 일어나 창 밖을 보니 눈이 아주 많이 왔다. 폭설이다. 지금도 그치지 않고 계속 눈은 내리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오늘 내가 다니던 병원에 건강검진 예약을 해 놓아서 안 가면 안 되는 날이다. 이런 날은 택시도 잘 다니지 않을 텐데. 눈이 와도 엄청 많이 왔다. 근래 몇 년 사이 이렇게 많이 온 눈은 처음이다. 세상이 아주 하얀 설국이다.


"여보 이런 날 운전 힘들어요." 택시 불러 타고 갈게요."

"아니야, 택시 잡기 힘들어."


굳이 같이 가시겠다고 서두른다. 아직 8시가 조금 넘었는데,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성격이 급한 남편은 다른 날 외출 할 때도 먼저 신발 신고 현관문을 잡고 기다리신다. 나는 그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함께 나가야 하는데 혼자 밖에서 기다리면 어쩌란 말인가? 다른 사람 마음만 바쁘게. 그러지 마시라고 한두 번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이제는 그러는 가 보다 하면서 살아간다.



아파트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길이 없다. 어느 곳이 턱이 있는 곳이고 어디가 길인지 구분이 안 간다. 모든 것이 눈 속에 묻혀 있다. 마음 따뜻한 우리 라인 5층 시인 친구는 싸리비를 들고서 길을 내기 위해 눈을 쓸고 있다. 아직 경비 아저씨들은 보이지 않고 누구라도 눈길에 넘어지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눈을 쓸고 있다.


"힘들어 이제 그만 들어가"

우리 라인에서 나오는 분들 길 좀 내 드리고요"


참 그 모습이 아름답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시인 친구 복 받을 거야." 나는 한마디 멘트를 날리고 우리 차 눈을 쓸고 있다. 시인이라서 그토록 마음이 따뜻할까? 아니 그 사람 품성 일 것이다. 정말 그 친구만 보면 마음이 훈훈하다. 조금만 마음을 내면 다른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는 시간.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다시 돌아본다.


차 위에 눈을 적당히 쓸고 남편은 운전을 한다. 길거리 차들도 엉금엉금 기어가듯 운행을 하고 우리도 겨우 병원에 도착을 했다. 눈이 많이 와서 그런지 병원 안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일 년 동안 다른 날 다 두고 오늘 같은 날 검진을 하는 일은 무엇이람, 나는 혼자서 중얼 거린다. 웬만하면 남편이 한 소리 할 텐데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은 다행이다.


검진할 때 제일 힘든 부분은 위 내시경이다. 수면을 하면 쉽겠지만 나이 들면 그것도 잘 권하지 않는다. 혹여 좋지 않은 결과가 오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런다. 10시가 조금 넘어서야 끝났다. 마음이 후련하다. 올해가 가기 전 마쳐야 할 숙제를 다한 기분이다. 다음에는 12월이 아닌 달 미리미리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천천히 오고 있는데도 차가 뱅글 돈다. 옆에 차가 없어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충돌했을 번 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오래전 예전에 서울에서 군산 내려오는 눈길에서 사고 난 적이 있어 눈길 운전을 하면 그때 놀랐던 기억이 떠올라 깜짝깜짝 놀란다. 정말 살 살 기어 오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으로 들어오고서야 한숨을 쉰다. 이런 날 외출이라니.



오늘은 동지다. 그래도 팥죽을 먹어야 할 것 같아 병원에서 오는 길 팥죽집에 들러 팥죽 2그릇 사가지고 집으로 왔다. 동지 날 팥죽을 먹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섭섭하다. 올해 먹지 않은 팥죽을 언제 찾아 먹을까. 팥죽을 먹으면 또한 살 먹는다. 아이들과 함께 살 때는 빼놓지 않고 팥죽을 끓였는데 지금은 그냥 건너뛰고 편하게 사 먹는다.


어쩌자고 세월은 붙잡으려 해도 자꾸만 달려가고 있는지. 나이에 따라 세월의 속도가 빨라진다고 한다. 그 말이 정말 맞는 말이다. 일 년이 금세 지나가고 있다. 며칠이 지나면 새해가 되고. 시간은 어김없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게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폭설은 내리고 밖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눈이 워낙 많이 왔기에 사람들의 삶도 멈춘 듯하다. 사방이 고요한 설원이다. 모든 사물이 눈 속에 묻혀 차가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을 구분할 수가 없다. 하얀 설원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마치 동화 속 세상 같다. 생애 이런 날이 몇 번이나 올까 싶다. 오늘 있었던 일은 내 기억 속 서랍에 저장해 놓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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