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젊은 날, 봄바람이 산등성이를 넘어설 때면 나는 엄마에게 달려갔었다. 따뜻한 바람은 그리움을 싣고, 엄마가 보고 싶어 지면서 봄빛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그리움도 따라왔다. 유난히 사람이 그리운 날이 있다. 나는 그때 가족과 떨어져 직장을 다니면서 혼자 자취를 할 때였다.
혼자서 먹는 밥은 허기지고 쓸쓸했다. 그러다 외로움이 가슴까지 차오르면 엄마에게 달려간다.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묵은지 찜해 줘" 하고서 엄마에게 조른다. 가족을 만나는 일은 외로움을 덜어내는 일이었다.
묵은지는 하룻쯤 담가 놓아 짠맛을 조금 빼고서야 제대로 묵은지 찜의 맛을 낼 수 있다. 들깨 가루를 넣는 것이 하나의 팁이다. 엄마가 만들어 준 김치 찜을 먹고 나서야 나는 기운을 얻고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둥근 밥상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손으로 쭈욱 쭈욱 찌져 밥에다 올려놓고 먹는 김치찜은 밥 한 그릇이 뚝딱 비워지는 음식이었다.
예전 시골에는 먹을 반찬이 거의 푸성귀가 반찬이었다. 봄 밥상은 봄나물까지 올라와 다른 때 보다 밥상이 더 풍성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온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리게 해 주는 안전성이 있다고 말한다. 좋아한다는 마음이 얼마나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 기운을 받기 위해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는 게 어렵지만 때때로는 행복했었다. 가족이란 울타리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처럼 발전된 세상은 아니라도 정이 있고 놀 거리도 많았다. 사는 것이 삭막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운 날들이다. 부모님은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 노심초사 자식들 밥 굶기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을 하셨을 것이다.
예전에는 살아가는 일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힘겨웠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언제나 희망을 품고 더 나은 날을 꿈꾸었다. 나는 한참 민감 한 젊은 날, 내 마음대로 살 수 없음이 불만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많은 나이였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내 힘든 마음을 풀 곳은 엄마뿐이었다. 나의 감정 배출은 엄마였다.
왜 그렇게 엄마 마음을 이해하지 않고 엄마에게 싫은 소리를 했는지,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서야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다 흘러간 지난날이었다. 엄마 마음 아프게 해서 죄송하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못 해 드렸는데 엄마는 세상에 안 계신다. 내가 자식을 낳아 기르고 엄마가 된 지금에야 엄마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때는 너무 철이 없었다. 모든 일은 내가 겪어 보아야 그 일을 이해할 수 있다.
엄마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들에게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아무 말없이 자식들에게 따듯한 밥 한 끼 먹이려고 부단히 애쓰셨던 엄마. 엄마는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다. 자식들 위해서 무엇을 하던 그게 엄마 인생인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서야 부모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딸들이 장성해서 내가 엄마가 되고서야 알았다. 엄마도 한 사람의 인격체인 걸 그때는 몰랐다. 사람 사는 일이 당연 한 건 없다는 걸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을 살아 내고야 알게 되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그 시절 부모님을 이해를 못 하고 항상 불만이었던 그날들이 기억 속에 떠오르면 마음 울컥하고 눈가가 촉촉해 온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예전에는 먹을 것이 귀했다. 우리 형제는 만나면 엄마가 해 주시던 묵은지 찜의 추억을 소환하고 엄마를 그리워한다. 된장과 멸치만 넣고 오랫동안 끓인 묵은지 찜은 세상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다. 형제들과 먹던 그 맛의 추억은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묵은지 찜은 겨울을 나고서야 맛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김치도 묵을수록 그 맛이 더 깊어진다. 4월이 넘어가면 나는 꼭 묵은지 찜을 먹고 싶어 2년 묵은 김치를 꺼내여 많은 양을 찜을 만든다. 주변 지인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밥 먹을 일이 있으면 김치찜을 준비한다. 김치찜은 많은 양을 오래 2시간이 넘게 끓여야 제맛이 난다.
음식도 깊은 맛을 내려면 기다림이다.
'나의 어머니에게도 추억이 있다는 것을 참으로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신동호 시인의 '봄날 피고 진 꽃에 대한 기억'이란 시 을 읽고서야 엄마에 대한 생각에 울었다. 봄이면 마당에 앉아 봄나물을 다듬으시던 어머니, 혼자서 콧노래를 부르시던 어머니.
나이가 들고 예전 살았던 날들이,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 짙어져 온다. 올해 80이란 나이의 무게가 느껴져서 더 그러지는 않을까. 생과 사의 경계를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신비가 숨어있다. 살아가는 동안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안에 자리한다.
나도 엄마를 닮았나 보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묵은지 찜을 해서 나눈다. 나도 제일 잘하는 음식이 묵은지 찜이다. 엄마의 맛이 전수되었나 보다. 여자들이 많이 모이는 밥 먹을 일이 있으면 나는 묵은지 찜을 해 가지고 간다. 사람들은 고기반찬 보다 더 묵은지 찜을 맛있다고 칭찬을 하면 마음이 더 흐뭇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기술이 있다. 그 말에 나는 김치찜을 더 맛있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도 해 본다. 해산물 새우를 넣어도 맛있고 꽃게를 넣어도 더 말할 필요가 없이 맛있다. 문제는 비율이다. 된장도 많이 넣으면 안 되고 알맞게 넣어야 맛있다. 무엇이든 중용, 알맞은 것이 기술이다. 사람 사는 삶도 중용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도 내가 음식을 만들 때까지는 묵은지 찜을 해서 이웃과 가족에게 사랑을 전하며 나눔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