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늦추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평생을 시곗바늘에 쫓기듯 살았다. 하지만 지금,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내 시간은 멈춘 듯 흐른다.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하얀 설원. 예전 같았으면 "춥겠다" 생각했을 풍경이, 오늘은 "아름답다"로 다가온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조금 낯설지만, 퍽 편안해 보인다. 나는 지금, 어딘가로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해 가고 있다.
이름 모를 간이역에 내렸다. 코끝을 찡하게 울리는 차가운 겨울 공기. 자판기에서 뽑은 따뜻한 믹스 커피 한 잔을 손에 쥐니, 그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진다. 넥타이를 풀고 코트 깃을 세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의 이 완벽한 고독. 눈 밟는 소리가 '사박사박' 음악처럼 들린다. 혼자라는 건 외로운 게 아니라, 자유로운 것이었다.
역 근처 허름해 보이는 목조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는 투박한 온국수 한 그릇. 모르는 사람들 틈에 섞여 혼자 밥을 먹는 게 얼마 만인가. 후루룩, 뜨끈한 국물을 넘기니 얼었던 몸이 녹아내린다. "어르신, 여행 오셨나 봐요?" 주인장의 살가운 인사에 멋쩍게 웃어 보인다. 화려한 만찬은 아니지만, 내 인생 가장 맛있는 한 끼다.
숙소에 돌아와 낡은 수첩을 꺼냈다. 회사 다이어리가 아닌, 오직 나만의 기록장. 만년필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내일은 어디로 갈까?'라는 질문을 내게 던져본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예전엔 은퇴가 끝인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새로운 챕터의 첫 페이지였다. 나는 오늘 다시 청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