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것이 아니라, 여물어가는 것

인생

by 참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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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유난히 깊다. 커피 잔을 쥔 손등 위로, 나뭇가지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는다.

무심코 내려다본 손. 껍질이 얇아진 사과처럼 투명해진 피부 아래로 푸르스름한 핏줄이 지도처럼 얽혀 있다. 예전에는 이 주름이 부끄러워 감추기 급급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 굴곡진 선들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따라가 본다. 울퉁불퉁하다. 거칠다. 하지만, 단단하다.

이 손은 기억하고 있다. 새벽 첫차의 차가운 손잡이를 움켜쥐었던 그 악력을. 가족이라는 두 글자를 등 뒤에 업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렸던 그 시절의 속도를 말이다.

우리는 참 치열하게 살았다. 넘어지면 일어났고, 깨지면 다시 붙였다. 밥벌이의 고단함이 어깨를 짓누를 때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진통제 삼아 버텼다. '나'라는 주어는 늘 문장의 맨 뒤로 밀려나 있었다. 그래도 그게 억울하지 않았다. 그 시절엔 그게 사랑이었고, 그게 삶의 전부인 줄 알았다.

은퇴라는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비로소 문장 맨 뒤에 있던 '나'를 다시 앞으로 데려왔다.

처음엔 낯설었다. 알람 소리 없는 아침이 불안했고, 명함 없는 내 이름 석 자가 허전했다. 맹렬히 회전하던 팽이가 멈췄을 때의 그 어지러움 같았다. 사회라는 무대에서 조명이 꺼진 뒤, 홀로 남겨진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계절이 몇 번 바뀌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조명이 꺼진 게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자연광 아래 선 것임을. 치열함이 빠져나간 자리에 고요가 채워졌다.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쳤던 길가의 들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믹스커피 한 잔의 달콤함이 혀끝에 감돌고, 손주 녀석의 엉뚱한 질문에 배를 잡고 웃을 여유가 생겼다. 젊음이 '폭죽'이라면, 노년은 '모닥불'이다. 화려하게 터지고 사라지는 순간의 찬란함은 없어도, 은근하게 타오르며 주위를 덥히는 따스함이 있다. 타닥타닥,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태우고 남은 숯처럼, 우리의 삶은 이제 연기 없이 맑은 열기를 내뿜는다.

거울을 본다. 눈가에 잡힌 주름은 내가 웃었던 날들의 기록이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치열하게 고민했던 밤들이 남긴 훈장이다. 늙음은 낡아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결을 온전히 견뎌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 그윽한 무늬가 생기는 과정이다.

가을 들판의 벼를 보라. 고개를 숙인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속이 꽉 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지금, 당신의 삶은 저무는 것이 아니다. 가장 단단하고 아름답게, 여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햇살이 조금 더 길어졌다. 나는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쓰지 않다. 달큼하다. 지금 내 삶의 맛처럼.

인생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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