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현장
유독 눈이 잦았던 해였습니다. 강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다 못해 살점을 꼬집는 듯했던 12월의 한강, 그곳이 우리의 촬영 현장이었습니다. 카메라 렌즈조차 얼어붙을까 노심초사해야 했던 날씨였지만, 현장은 묘한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컷! 식사하고 갈게요!" 점심 드시고 1시간 후 뵐게요
같이 식사 가자고 했지만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에 밥 먹는 시간조차 우리에겐 사치일 때가 있습니다.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을 먼저 따뜻한 식당 차로 보내고 나니, 텅 빈 현장엔 덩그러니 장비들만 남았습니다.
그때 스크립터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패딩 모자를 눌러쓰고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습니다. 화려한 밥상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건 허기를 채우는 것보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여줄 무언가였으니까요.
한강 변 편의점 간이 테이블. 뽀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컵라면 두 개가 놓였습니다. 후루룩, 뜨거운 국물을 넘길 때마다 식도부터 위장까지 찌릿한 온기가 퍼져나갔습니다.
"진짜 춥네요. 감독님 근데 라면은 왜 이렇게 맛있죠?" 그러게 진짜 맛나다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웃던 스크립터의 그 한마디가 참 뭉클했습니다. 창밖에는 잿빛 한강이 흐르고 눈발이 흩날리는데,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이 투박한 국물 한 모금이 어찌나 달게 느껴지던지요.
그날 우리가 삼킨 건 단순히 라면이 아니었을 겁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내고 있다는 동질감, 그리고 서로의 언 손을 녹여주던 무언의 응원이었겠지요.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12월의 한강을 지날 때면 그때가 생각납니다. 가장 매서운 추위 속에서, 가장 뜨겁게 일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짧은 점심시간, 세상 그 어떤 코스 요리보다 따뜻했던 컵라면의 온기 말입니다.
어쩌면 치열함이란 그런 것 아닐까요.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기어이 서로를 덥혀주는 마음 같은 것. 그래서인지 유독 그 겨울의 기억은 춥지 않습니다. 잘 지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