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떠나는 것도 많고 바뀌는 것도 많습니다

by 참새수다

몸이 무너지니 마음의 둑도 함께 터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아픔은 나를 방 안 가장 깊은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쉼 없이 돌아가던 나의 세상은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멈춰 섰습니다.

그토록 당연하게 여겼던 아침의 공기, 가벼운 발걸음, 사람들과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아득해졌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몸 하나 가누기 힘들어지니, 그동안 내가 움켜쥐려 발버둥 쳤던 것들이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떠난 건 '불필요한 관계'였습니다. 내가 건강하고 밝을 때, 무언가 줄 수 있을 때만 곁에 머물던 사람들은 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멀어졌습니다. 서운함이 밀려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습니다.애써 웃어주지 않아도, 억지로 안부를 묻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묘하게 자유롭게 했습니다. 아프다는 핑계는 꽤 훌륭한 거름망이 되어 곁에 남아야 할 사람과 스쳐 지나갈 사람을 명확히 구분해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바뀐 건 '삶의 속도'입니다.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지금 쉬면 영영 도태될까 봐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조바심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그 빈자리를 아주 사소한 감각들이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창가에 비스듬히 들어오는 오후 4시의 햇살이 얼마나 따스한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미지근한 물 한 모금이 얼마나 달콤한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가족의 손길이 얼마나 거쳤는지.

아프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입니다. 너무 빨리 달리는 차 안에서는 바깥 풍경이 그저 흐릿한 선으로만 보이듯, 나 역시 삶을 그저 스쳐 지나가고만 있었던 건 아닐까요.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꽃이 보이고, 바람이 느껴집니다. 잃은 것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건강도, 사람도, 시간도.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떠난 것들은 내 삶에 군더더기였을지 모릅니다.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걷다가 넘어진 김에, 필요 없는 짐들을 바닥에 내려놓게 된 셈입니다.


아픔은 나를 괴롭히러 온 불청객이 아니라, 잠시 멈춰서 나를 재정비하라고 찾아온 엄격한 선생님 같기도 합니다. 이제야 나는 나에게 조금 더 솔직해집니다.

비워진 자리는 쓸쓸함이 아니라 홀가분함입니다. 이제 몸과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면, 그 텅 빈 공간을 정말 소중한 것들로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들로만 채우고 싶습니다.

아프니까 떠나는 것도 많고 바뀌는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참 다행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내 삶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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