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나 많은 줄 몰랐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날이 되어서야, 문득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봅니다.
어릴 적엔 그저 어른이 되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학교에 가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성적표에 찍힌 숫자에 울고 웃으며 모범생이라는 칭찬 한마디에 으쓱대던 시절. 좋은 대학이라는 관문만 통과하면 인생의 탄탄대로가 열릴 거라 믿었지요.
그런데 막상 문을 열고 나오니, 더 가파른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좋은 직장이라는 명함을 얻기 위해 수없는 밤을 지새웠고, 겨우 자리를 잡으니 승진이라는 사다리를 올라야 했습니다. 상사의 눈치, 동료와의 경쟁, 제 몫을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 월급 통장은 스쳐 지나가고, 세금이며 공과금이며 나라에 내야 할 것들은 어찌 그리 꼬박꼬박 찾아오던지요.
숨 좀 돌릴까 싶을 때쯤, '결혼'이라는 숙제가 날아옵니다. 남들 다 하니까, 때가 되었으니까, 그렇게 가정을 꾸리고 나니 이제는 '나'는 사라지고 '부모'라는 이름표만 남았습니다.
아내의 생일, 아이들의 생일, 양가 부모님의 안부, 친구들의 경조사. 청첩장을 받으며 웃고, 부고장을 받으며 울고. 매달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쟁터 같은 세상으로 출근하면서도, 퇴근길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킨 한 마리 사 들고 들어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건강보험료 낼 때마다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싶고, 차곡차곡 저금해서 노후 준비해야 한다는 말에 커피 한 잔도 망설여지던 날들. 정말이지, 살면서 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 줄 몰랐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왜 이토록 쫓기듯 살아왔을까요. 무거운 짐 가방을 메고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잠시라도 쉬면 큰일이 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지워가다 보니, 어느새 거울 속에는 낯선 노인 하나가 서 있습니다. 이제야 겨우 은퇴라는 마침표를 찍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려는데, 야속하게도 몸이 고장 나기 시작합니다. 병원 문턱을 넘나들며 약봉지를 챙기는 게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린 지금. 아프지 말아야지, 자식들 짐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서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리도 바쁘게 달렸을까요.
숙제만 잔뜩 하다가 정작 놀이터에서는 놀아보지도 못한 아이처럼, 삶이라는 시간을 의무감으로만 채운 것은 아닌지 가슴이 아려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 치열했던 숙제들이 있었기에, 당신의 삶은 비로소 완성된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힘들게 버텨낸 직장 생활 덕분에 가족이 따뜻한 밥을 먹었고, 눈치 보며 견뎌낸 시간 덕분에 아이들이 번듯하게 자랐습니다. 당신이 꼬박꼬박 낸 세금과 보험료가 누군가의 삶을 지탱했을 것이고, 당신이 챙긴 경조사가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와 축복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미안해하고, 그만 조급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남은 마지막 숙제는 딱 하나입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것. 그리고 언젠가 이 세상과 작별하는 날,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가볍게 떠나는 것. 나, 세상 소풍 와서 참 많은 일을 해냈구나.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소풍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안녕하고 손 흔들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부디 오늘 밤엔, 지친 당신의 어깨를 스스로 토닥여 주시길 바랍니다. 참, 애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