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차고, 그 남자의 700가지 역사

올드카

by 참새수다

창고의 육중한 문이 열리자, 코끝으로 훅 끼쳐 오는 것은 단순히 묵은 기름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응축된 세월의 향기였고, 누군가가 평생을 바쳐 지켜낸 고집스러운 시간의 무게였다. 내 지인은 차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차라는 물성에 깃든 시대를 수집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가 안내한 거대한 공간에는 700대가 넘는 올드카들이 마치 긴 잠에 빠진 거인들처럼 고요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영상 속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먼지 덮인 보닛 위로 내려앉을 때, 그 차들은 단순한 고철 덩어리가 아니라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역사책으로 변모한다.


우리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인이 뒷좌석에 앉아 고뇌하던 그 검은 세단을 기억한다. 혹은 경제 발전의 역군이라 불리던 기업가들이 누비던 차를 보며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떠올리기도 한다. 놀랍게도 화면 속 그 장면을 완성해 주던 '시대의 조연'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모아 온 것은 단순한 탈것이 아니라, 1970년대의 서울 거리였고, 80년대의 뜨거웠던 광장이었으며, 누군가의 가장 화려했던 전성기였다. 차 한 대 한 대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에는 기계에 대한 애정을 넘어, 사라져 가는 것들을 붙잡아두려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유독 시선을 끄는 것은 투박한 초록색 포니와 파란색 삼발이 트럭이었다. 그 순간,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풍경이 흑백 영화처럼 되살아났다. 골목 어귀에서 하얀 연기를 붕붕 뿜어내며 소독차가 지나가면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와아 소리를 지르며 꽁무니를 쫓곤 했다. 겨울이면 검은 연탄을 가득 싣고 가파른 달동네를 오르내리던 그 삼발이 차, 아버지의 첫 출근길을 함께했던 포니의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 이곳에 주차된 차들은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졌던 가장의 어깨였고, 가난하지만 따뜻했던 그 시절 우리네 골목의 자화상이었다.


녹슨 범퍼와 빛바랜 페인트 자국은 흉터가 아니라 훈장이다. 700여 대의 차들이 품고 있는 것은 기계적 성능이 아니라, 그 차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의 인생이다. 핸들을 잡았던 누군가의 땀방울, 뒷좌석에서 나누었던 밀어들, 그리고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갔던 계절들이 차가운 금속 안에 고스란히 화석처럼 박제되어 있다. 지인은 그 모든 기억이 풍화되어 사라지지 않도록, 매일 차를 닦고 조이며 숨을 불어넣는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물'이라 부르며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 속에, 사실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리움의 원형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을 닫고 나오는 길, 등 뒤로 700개의 시간이 다시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공허하지 않았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 어지러울 때, 언제든 찾아가면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줄 과거가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차고는 단순히 차를 세워두는 곳이 아니었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놓쳐버린 우리의 지난날을, 그리고 그 시절의 순수했던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정거장이었다. 올드카를 사랑하는 그 남자의 인생은, 결국 사람과 추억을 사랑하는 일과 맞닿아 있었다. 백사장님 늘 건강하시고 편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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