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나를 만나는 시간
마지막 출근 날, 책상을 정리하며 느꼈던 감정은 시원섭섭함보다는 기이한 부유감에 가까웠습니다. 30년 넘게 내 몸의 일부처럼 목에 걸려 있던 신분증을 반납하던 순간, 마치 피부의 한 겹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서늘함이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매일 아침 전쟁처럼 치르던 지옥철의 소음, 믹스커피 타는 냄새가 밴 탕비실, 그리고 나를 지탱해 주던 '부장'이라는 직함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린 다음 날 아침, 6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을 때 마주한 천장은 낯설 만큼 하얗고 고요했습니다. 사회는 나를 '은퇴자'라 명명하며 정중히 문 밖으로 밀어냈고, 나는 그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에서 빠져나와 덩그러니 거실 한복판에 놓인 낡은 소파 같은 처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제2의 인생'이라며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당장 내게 닥친 현실은 세상과의 단절, 즉 견고한 성벽 밖으로 추방된 듯한 막막한 고립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립의 시간은 의외의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연락이 뚝 끊긴 휴대폰을 바라보며 쓸쓸함을 곱씹던 어느 오후, 베란다 창가로 깊숙이 들어오는 햇살의 입자가 이토록 투명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평생을 사무실 형광등 아래서 서류 뭉치와 씨름하느라, 오후 2시의 햇살이 얼마나 따스하게 마루를 데우는지, 아파트 단지의 목련이 어떤 순서로 꽃망울을 터트리는지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사회와의 격리라고 느꼈던 그 시간은 사실, 소음과 속도에 가려져 있던 '진짜 세상'과의 조우였습니다.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나'라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의 상사, 누군가의 부하, 가장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고 나니, 나는 그저 걷기를 좋아하고 믹스커피보다는 갓 내린 원두 향을 사랑하며, 오래된 팝송을 흥얼거리는 취향을 가진 한 인간이었습니다.
정년퇴임은 사회로부터의 유배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귀환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열심히 타인의 속도에 맞춰 달리느라 내 심장 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 호흡대로 걸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물론 소속감이 주던 안락함은 사라졌고, 광야에 홀로 선 듯한 외로움이 불쑥 찾아올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나를 갉아먹는 독이 아니라, 내 내면을 단단하게 채워줄 재료가 됩니다. 어쩌면 제2의 인생이라는 거창한 말보다는, '진짜 내 인생'의 시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릅니다. 사회라는 거대한 궤도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라, 나만의 궤도를 만들어가는 항해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나는 명함이 아닌, 내 눈빛과 표정으로 나를 증명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조금 느려도 괜찮고, 조금 헤매도 괜찮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광고카피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