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겨울 여행
계절의 틈새로 무작정 도망치고 싶은 날이 있다. 귀를 웅웅 거리는 도시의 익숙한 소음들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고, 매일 걷던 보도블록의 회색빛이 견딜 수 없이 무겁게 다가오는 그런 날이면 나는 마음속에 오래된 기차표 한 장을 꺼내 든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투명한 곳, 소리 없이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세상의 모든 모서리를 둥글게 감싸 안는 곳. 그곳은 지도 위에 존재할 수도, 혹은 나의 간절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녕, 나의 겨울’이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순간, 붉은 설렘을 실은 기차는 이미 하얀 세상 속을 달리고 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답다. 첩첩산중 굽이진 능선 위로 설탕 가루처럼 뿌려진 눈, 그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붉은 열차의 강렬한 대비는 시리도록 선명하다. 차창에 입김을 호호 불어 작은 하트를 그려보는 일, 이어폰 너머로 흐르는 음악에 맞춰 덜컹거리는 기차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은 오롯이 혼자이기에 가능한 사치다. 누군가는 묻는다. 그것이 진짜 존재하는 풍경이냐고. 이제 우리는 AI라는 붓을 들어갈 수 없는 곳을 그리고, 닿을 수 없는 온도를 만져낸다. 픽셀로 쌓아 올린 풍경이라 한들, 그 영상을 보며 내 마음이 느낀 서늘한 해방감과 벅차오르는 감동까지 가짜일 수는 없다. 오히려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은 기술은 가장 이상적인 ‘나의 겨울’을 눈앞에 생생하게 소환해 낸다.
정적만이 감도는 간이역에 내려선다. 발자국 하나 없는 눈길을 밟으며 생각한다. 이제 길을 잃어도 좋은 여행의 시작이라고. 어쩌면 우리는 완벽하게 계획된 일상에 지쳐, 이토록 무해하고 안전한 방황을 꿈꿔왔는지도 모른다. 눈앞에 펼쳐진 저 설산의 장엄함 속에서 나의 고민은 아주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진다. 이토록 완벽한 고독, 이토록 충만한 겨울. AI가 선물한 이 하얀 세상 속에서 나는 비로소 온전한 나를 마주한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내 안의 붉은 설렘이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소리 없이 내려앉는 겨울 속에서, 나는 가장 뜨거운 위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