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비애] 25일, 내 통장에 꽂힌 투명한 빨대들

by 참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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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의 숫자가 25일을 가리키면, 사무실의 공기조차 미묘하게 달라진다.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견뎌낸 대가이자 노동의 신성한 결과물인 '월급'이 당도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안도감은 찰나에 불과하다. 스마트폰의 진동과 함께 입금 알림이 뜨는 그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흡입력이 내 통장을 향해 맹렬하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을 '빨대'라 부른다. 갈증 난 누군가가 얼음 띄운 콜라에 빨대를 꽂아 단숨에 들이켜듯, 카드사와 은행, 각종 공과금이라는 이름의 빨대들이 내 소중한 급여 통장에 사정없이 꽂히는 것이다. 그들은 망설임이 없다. 내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쪽!" 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강력한 진공청소기의 흡입력으로 숫자를 빨아들인다. 지난달의 내가 긁었던 카드 할부금, 숨만 쉬어도 나가는 관리비, 미래를 위한다며 들어둔 보험료까지, 빨대의 종류는 다양하고 그 개수는 야속할 정도로 많다.


잠시나마 통장을 스쳐 지나갔던 그 숫자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일종의 의식처럼 엄숙하고도 허망하다. 마치 내 통장이 돈을 보관하는 금고가 아니라, 잠시 물이 머물다 흘러가는 도관(導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매달 뼈저리게 확인하는 과정이다. 5G급 속도로 빠져나가는 잔고를 보며 우리는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퍼가요'라는 짧은 알림 메시지 하나에 노동의 고단함이 씻겨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은 갈증을 느끼게 되는 아이러니.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는 텅 빈 통장은, 마치 다 마신 음료수 컵 바닥에서 얼음끼리 부딪히며 나는 달그락 소리처럼 공허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이 수많은 빨대들을 감당하기 위해, 그들이 빨아먹을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기 위해 매일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다음 달의 25일을 기다린다. 비록 내 통장이 잠시 머무는 정거장일지라도, 빨대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아주 적은 액수의 잔고로나마 소박한 위로를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 빠져나간 줄 알았는데 용케 바닥에 조금 고여 있는 남은 음료를 들이켜듯, 우리는 그 자투리 돈으로 치킨 한 마리를 시키거나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빨대가 꽂히는 아픔을 알면서도, 그 빨대를 꽂을 수 있는 음료가 제공된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지만, 이것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다수 직장인의 적나라한 초상이기도 하다.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빨대들은 내 통장을 뷔페처럼 즐기고 떠났다. 텅 빈 통장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읊조린다. 부디 다음 달에는 빨대의 개수가 하나라도 줄어들기를, 혹은 빨대가 빨아들일 음료의 양이 조금이라도 더 넘쳐흐르기를 바라는, 소박하고도 간절한 기도를 올리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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