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창덕궁] 젖은 낙엽 위로 번지는 계절

가을이 떠나던 즈음

by 참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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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떠날 채비를 마친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요란하게 쏟아지는 장대비가 아니라, 세상의 채도를 한 톤 낮추며 차분하게 내려앉는 초겨울의 비였습니다.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늘어선 가로수들은 이제 막 마지막 옷을 벗어던지는 중이었습니다. 바닥에 흩뿌려진 노란 은행잎들은 빗물을 머금어 아스팔트 위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떠나기 싫어 떼를 쓰는 아이의 손바닥 같기도 하고, 한 계절을 치열하게 살아낸 이들이 남긴 마지막 인장 같기도 했습니다. 차가운 빗줄기 사이로 훅 끼쳐 오는 젖은 흙 내음과 낙엽의 냄새는 코끝을 시리게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데워주는 기묘한 온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도로 위, 오가는 차량들이 뿜어내는 붉은 미등(尾燈)은 빗물 고인 바닥을 캔버스 삼아 긴 꼬리를 그리며 번져 나갔습니다. 젖은 땅은 거울이 되어 도시의 빛을 있는 그대로, 아니 본래보다 더 화려하고 애틋하게 반사하고 있었습니다. 빗물에 굴절된 빛들은 제멋대로 흩어지면서도 낙엽의 노란 빛깔과 어우러져 마치 유화 물감을 두껍게 발라놓은 듯한 질감을 만들어냈습니다. 신호 대기 중인 차들이 뿜어내는 불빛과, 약국 간판의 하얀 형광등 불빛, 그리고 가로등의 주황빛이 뒤섞인 거리는 비가 오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물기와 빛이 빚어낸 찬란한 수채화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떠나는 것들에 대해 쓸쓸함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비 오는 밤, 창덕궁 앞거리에서 마주한 이 풍경은 떠남이 마냥 슬픈 것만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가지를 떠나 바닥으로 내려앉은 잎새들도,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계절의 흔적들도, 저마다의 빛을 품고 마지막 순간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빛나고 있었으니까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이 빗물에 일그러지며 몽환적으로 다가오는 이 시간, 늦가을의 끝자락은 겨울의 냉기가 아니라 젖은 낙엽 같은 차분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습니다. 비는 그치고 나면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만, 오늘 밤 이 도로 위에 번지던 빛의 기억만큼은 긴 여운으로 남아 다가올 겨울을 견디게 할 온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나는 왜? 비 오는 날을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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