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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계산인 홍석경 Dec 05. 2022

서역인이 쥐고 있는 막대기는 폴로 스틱일까?

경주 구정동 신라 방형고분의 모서리돌 부조(서역인상)

2019년 가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 전시회>가 있어 구경을 했는데, 여기서 참으로 재미난 유물을 보았다.

사진 1. <로마 이전, 에투루리아> 특별 전시회 포스터 (국립중앙박물관)

에트루리아(Etruria)는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100년경까지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 지역에 있던 고대 국가이다. 로마 공화정 이전에 이탈리아에 존재했던 문명으로, 고대 그리스 문명과 함께 로마문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로마건축의 특징인 아치 기술도 에트루리아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한다.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 특별 전시회에는 300여점의 전시품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필자의 눈을 사로 잡았던 유물은 "점성술사가 묘사된 기념비"라는 제목의 돌기둥이다.

사진 2. 점성술사가 묘사된 기념비 (기원전 6세기 말, 사암에 부조를 새김,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기념비 설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피에솔레 지역에서 발견되어 일명 '피에트레 피에솔라네' (피에솔레의 돌)로 불리는 기념비이다. 앞면에는 무덤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점성술사가 묘사되어 있다. 점성술사는 에트루리아 양식의 옷과 신발을 갖추었으며, 오른손에는 사제임을 상징하는 구부러진 모양의 점술용 막대기를 들고 있다. 점성술사는 신이 인간의 행위를 허락하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새가 나는 모습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


이 기념비에 새겨진 얕은 부조(점성술사, 사자)와 매우 비슷하게 생긴 유물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그것은 바로 후대신라 제44대 민애왕(재위: 838-839년) 또는 제48대 경문왕(재위: 861-875년)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경주 구정동 방형분의 모서리 기둥에 새겨진 부조상이다.  

사진 3. 경주 구정동 방형고분의 모서리돌 부조

우리나라에서는 왼쪽의 무인상을 서역인(페르시아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눈이 퉁방울처럼 부리부리하고, 머리에는 머리띠(디아뎀.Diadem)를 두르고, 구레나룻과 수염을 풍성하게 길렀다. 이와같이 서역인을 닮은 무인상은 이 왕릉보다 조금 앞선 괘릉(신라 38대 원성왕릉)이나 흥덕왕릉에서도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이 서역인상의 경우, 끝이 구부러진 막대기를 두 손으로 쥐고 있는데, 관련 학계에서는 페르시아인들이 즐겨했다는 '폴로 스틱'일 것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이러한 서역인상이 등장하는 왕릉(괘릉, 흥덕왕릉, 그리고 경주 구정동 방형분)은 8-9세기에 걸쳐서 조성된 것이다. 이는 8세기에 중국의 황제릉 (또는 왕릉) 앞에 관검석인상을 처음 세우기 시작한 당나라의 능제를 본떠서, 후대신라에서도 왕릉 앞에 처음으로 석인상을 설치한 것인데, 특이하게도 당나라 왕릉이나 황제릉에 없는 무인상(일명 서역인상)과 사자상을 세웠다.

사진 4. (왼쪽) 점성술사가 묘사된 기념비 (기원전 6세기, 에트루리아), (오른쪽) 경주 구정동 방형고분의 모서리돌 부조. 무인상이 들고 있는 막대기는 폴로 스틱일까?

당나라 능제를 본 떠 만든 후대신라 왕릉에 서역인을 닮은 상을 세운 이유는 무엇인지?, 머리띠를 두르고 구레나룻과 수염을 기르고, (괘릉의 경우처럼) 헤라클레스 몽둥이를 붙잡고 있거나 (경주 구정동 방형분처럼) 폴로 스틱처럼 끝이 구부러진 지팡이를 들고 있는 무인상이 과연 교역을 하기 위해 신라에 왔던 서역인을 모델로 한 서역인상인지? 지금도 여전히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2014년도에 경주대학교 임영애 교수는 종래 서역인상으로 알려진 신라왕릉의 무인상은 당시 시대상황을 봤을 때, 신라에 왔던 서역인(아마도 신분이 낮은 장사치)을 수호신상의 모델로 했다는 주장은 상식과 사실에 어긋나며 (중국 당나라의 전성기에 수도 장안에는 수천-수만명의 서역인이 거주했지만, 황제릉이나 왕릉에 서역인을 수호신상으로 세운 예가 없다고 한다.) 이 호신상은 불교의 금강역사상을 모델삼아 제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사진 5. (왼쪽) 괘릉(신라 38대 원성왕릉)의 서역인을 닮은 무인상은 장화를 신었다 (오른쪽) 경주 서악동 폐고분의 석실 돌문에 새겨진 금강역사상은 맨발이다.


필자의 생각은, 교역을 위해 신라에 왔던 서역인(신분이 낮은 장사치)을 모델로 했다는 주장은 8-9세기의 실크로드 주변의 시대상황과 중국 당나라와 신라의 정치상황을 고려했을 때, (경주대 임교수의 주장처럼)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사산조 페르시아(AD 224-651년)는 이미 아랍제국에 의해 멸망당했고, 고선지 장군의 탈레스 전투(AD 751년) 패배 이후,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역(중국과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간 문물교류)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중국 당나라 역시 9년에 걸친 안사의 난(AD 755-763년)과 이어진 티벳의 오아시스 남북로(타림분지) 점령으로 제국의 멸망은 시간문제였고, 제 앞가림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후대신라 역시 8세기 이후엔 왕권다툼, 왕권을 둘러싼 귀족간 끊임없는 싸움으로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8-9세기는 동서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될만한 태평성대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경주대 임교수의 주장처럼 불교의 금강역사상을 모델로 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임교수가 예를 든 경주 서악동 폐고분의 석실 돌문에 새겨진 금강역사상과 괘릉의 무인상은 수염과 구레나룻이 풍성하다는 점만 빼고는 서로 닮은 구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신라 왕릉의 무인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디아뎀(Diadem)으로 불리는 머리띠를 하였다.

손에는 칼이라기 보다는 마치 헤라클레스의 올리브 몽둥이처럼 생긴 혹이 달린 몽둥이를 붙잡고 있다. (반면에 금강역사상은 마치 바즈라(Vajra: 벼락)처럼 생긴 것을 들고 있다.)

발에는 장화를 신었다. (반면에 금강역사상은 맨발이다.)


에트루리아의 점성술사 기념비와 경주 구정동 방형분의 서역인상은 시대적으로는 1천년 이상 차이가 있고 지리적으로는 동쪽 끝과 서쪽 끝에 위치해 있기에, 시공간 상으로 너무 많은 거리가 있어 직접 비교하기가 어렵지만, 이 두 유물을 비교함으로써 신라 왕릉의 서역인상의 정체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는 것 같아 여기에 소개한 것이다. (끝이 구부러진 막대기생김새가 비슷하다고 해서 폴로 스틱으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고,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다.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이 학술적으로 근거가 부족한 주장을 당당히 펼칠 때는 한숨만 나온다.)


사진 6. (왼쪽) 괘릉(신라 38대 원성왕릉)의 서역인을 닮은 무인상 (오른쪽) 쿠샨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카니슈카 대왕(재위: AD 127-144년)의 모습이 새겨진 금화.


사진 6 (왼쪽)에 보인 경주 괘릉(원성왕릉, 재위: AD 785-798년)의 무인상은 머리띠를 둘렀고, 구레나룻과 수염을 풍성하게 길렀고, 긴옷을 입고 허리띠를 맸으며, 마치 헤라클레스 몽둥이 같은 것을 한 손에 쥐고 있으며, 장화를 신었다. 외형상으로 이와 비슷한 인물은, 금강역사상이 아니라, (오른쪽)에 보인 쿠샨제국(AD 30-375년)의 제3대 황제인 카니슈카 대왕(재위: AD 127-144년)이다. 그는 왕관과 함께 디아뎀이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구레나룻과 수염을 기르고 긴옷을 입고 허리띠를 두르고 장화를 신었으며, 헤라클레스 몽둥이를 손에 든 모습도 있다. 후대신라 왕릉의 서역인상이 누구를 모델로 하여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런 것까지 포함하여 더 광범위하고 새롭게 연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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