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존재
이석원 산문집(일기형식), 달, 2009-2015(45쇄)
1971년 보통의 존재, 생. 38세의 나이에 쓴 일기 형식의 글로 170여 편의 짧은 글로 이루어진 책으로 딱 10년 전에 쓴 글이다. 작사, 작곡가(5th album, sister’s barbershop)이자 나이 탐험가
처음으로 여성의 손을 잡았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시작되던 글이 그로부터 6년 뒤 헤어졌다는 파격적인 글귀에 당황스러웠지만,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일상의 소소한 느낌과 괴롭고 외롭고 아픈 감정 그리고 가족의 삶을 너무나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표현을 해 줌으로써 저자의 마음 가까이 다가가서 위로도 해주고, 이야기를 더 들어주고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일게 하여 준다. 그중 연애, 사랑, 집, 이사, 설, 인생 매뉴얼, 영어를 배운 방법(한국어를 말하고, 영어로 번역하면서 외워 말하는 방법)그리고 중간중간 짤막한 시와 같은 글귀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엄마와의 관계(부적, 잔소리, 상식과 믿음, 가지나물, 7개의 학원, 3남 1녀, 청소년 정신상담, 우울증 치료 등)에서 비롯된 글 등을 통해 나와 아들의 관계를 돌아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하는 법은? 없다.라는 매뉴얼이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정말 답이 없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해주기도 하였다. 인생 특히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정에 대해 허무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오히려 보통의 존재에 대한 투항이 아닌 투쟁의 삶을 살았음을 그의 음악 앨범인 언니네 이발관에서 보여준다.
<어느 보통의 존재>
누구나 자신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실제로 오르기 어려운 산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필요하다...... 자신을 안다는 것. 그 잔인한 일 말이다. 어릴 적 나는 꾸미고 감추는 데 헌신적이었다....... 결국 있는 대로 드러내는 것이 가장 훌륭한 감추기이자 꾸밈이라는 진리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비로소 그 모든 컴플레스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안다. 내 키는 크지 않다는 걸. 난 결코 잘생기지 않았다는 걸. 난 잘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걸. 어쩌면 진작부터 알았을지 모른다. 다만 진짜 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
누군가에게 ‘당신은 소중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저마다 타고난 인격과 재능에 격차가 있고,, 귀천이 분명한 직업을 선택하게 되며, 개인이 품을 수 있는 꿈의 한계 또한 정해져 있다... 나는 희망을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무섭다. 희망 이후의 세계가 두렵기 때문이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인생이 고달프다고 한다. 사람은 때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어서 ‘나에게 허락된 것이 이만큼이구나’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제명에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 산다는 것은 그저 약간의 안도감을 가지고 시내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고르는 일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체념에서 비롯된 행복이라면, 더 많은 것을 갖고 싶고, 하고 싶은데 그 모든 욕망을 어쩔 수 없이 꾹꾹 누르고,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것에 백기를 든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건 자신에 대한 기만이 아닐까.
앨범 <가장 보통의 존재(1008)>의 주인공(본인)은 어느 날 자신이 보통의 존재임을 깨닫곤 몸서리친다... 나는 현실에 투항하게 될까? 누구든 위험한 희망을 선택하지 않아도 될 권리와 자유가 있다. 따라서 그는 얼마든지 안락과 정착을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일찍 자신에게 주어진 불리한 여건에 수긍하거나, 운명을 거역하기 위한 노력을 쉽사리 포기한다면... 하여 보통의 존재는 역시나 보통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된다면... 이야기의 결말이 조금은 허무하지 않을까. 주인공의 미래가 몹시도 궁금해진다.
그의 글 중 나의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글이 있어 적어본다.
<공개일기 쓰는 법>
감정이 글을 압도하게 되면 정작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담아낼 수 없게 된다. 글은 현실과 달라서 나의 감정의 진정성을 확인시킬 수 없다. 결국 슬프다는 감정 상태를 보다 선명히 드러내고 전달하기 위해서는 왜 슬픈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흡인력 있게 서술해야 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 흥미라도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사적 경험을 단지 서술, 나열한 것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슬프다’라고 직접적인 표현을 하는 것 이외의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 그중 가장 강력한 장치가 생각이다. 사실이 아닌 생각을 담는 것.
글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글쓴이의 생각을 엿보는 것이라는 주장도 그래서 가능하다.
<‘친구가 없다’라는 주제의 두 글을 비교>
‘세어보니 두 명밖엔 안 된다. 친구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글(아이들 일기를 보는 듯함)과
나는 친구가 없다. 근데 친구라는 게 뭘까? 친구는 어떨 때, 왜,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일까? 하며 생각을 전개하는 글의 차이는 크다.(글쓴이의 생각에 동조하거나 다른 의견을 갖는 등, 결국 저자와 대화를 하게 된다. 이것이 글쓰기이고 말 걸기이며 소통이자 대화인 것이다.)
<그대>
활짝 핀 꽃 앞에
남은 운명이
시드는 것밖에 없다 한들
그렇다고
피어나길 주저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