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방인들의 공간에서 뜻밖의 이름을 부를 줄이야!
어느 도시든 중앙역은 묘한 설렘과 경계 어디쯤이 공존하는 장소인 것 같다.
도착과 출발을 알리는 전광판의 사인들을 살피느라 분주하기도, 초조하기도, 기다리기도 하는 이 공간은 어느 시간이나 어느 날이나 비슷한 풍경이다.
특히나 유럽은 열차 연착의 에피소드들이 넘처나는 곳이기에 늘 긴장감을 동반하는 것 같다.
독일살이 초기에 자동차가 없던 몇 달 동안 새벽 기차를 타고 베를린이며, 쾰른 같은 도시들을 여행했었다. 새벽에는 1등석이 좀 저렴하기도 하고, 하루를 일찍 시작하기에 시간이 맞아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 기차를 이용했다. 그 시간의 기차역 공기는 안개냄새와 함께 더 서늘하다 못해 음산하다.
나는 예전부터 밤에 도착 한 낯선 도시에서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외로움에 곧잘 빠져들었다. 그런 느낌이 격해지면, 도착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런 먹먹함이 있어 숙소에 들어가 따뜻한 온기로 긴장을 풀기 전까지 한참은 잠식해 있고는 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그런 감정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어도, 여전히 달과 별 떠 있는 하늘을 보며 어디론가 나서는 길은 어째 영 우울하다. 곧 밝아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래서인지 기차역에 가면 떠나는 이들을 부러워도 하지만 조금은 긴장을 하게 된다.
소지품을 꽉 잘 챙기면서 주변을 연신 살핀다. 특히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이동이 있는 큰 역에서는 더더욱.
이렇게 살짝 피곤한 곳을 어찌 된 일인지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중앙역을 자주 들른다. 중앙역 앞에서 집에 오는 버스를 탈 수 있어서 좀 편리하기 때문이다. 가끔 중앙역의 사람들과 상점들도 구경할 겸.
여행객의 기운도 느낄 겸 해서.
그런데 역시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북적이다 보니 늘 정신이 없기도 하지만, 중간 플랫폼 앞마다 늘어선 빵, 커피 가게들로 인해서 더 복잡해 보이기도 한다.
뜨내기들 상대로 손님 응대를 하는 곳이 대부분이라 안 그래도 표정 없고 무뚝뚝한 독일사람들이 더 영혼이 없는 응대를 한다. 차라리 영혼이 없으면 고마우련만.
그 늘어선 가게들 중에 늘 화가 잔뜩 나 있는 아저씨가 응대하는(아마도 주인인 듯) 샌드위치 가게가 있다. 오래전 하필 그 가게에서 샌드위치 빵 2가지를 주문하고 한 가지만 주길래 하나는 왜 안주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사실 처음에는 잘 못 알아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저씨는 계산만 했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런데 소리를 지르는 거다. 엄청 목청 높여. 기!! 다!! 리!!라고!!!!! 이게 뭐지? 이 아저씨는?
사실 화가 나서 받아 든 빵을 그냥 던지고 올까도 생각했지만. 말도 잘 못하는 내가 분란이 생기면 더 불리한 상황인 것 같았다.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라 당황하기도 했고, 너무 화끈거려서 일보 후퇴했다.
그날 이후에 일부러 찾아가서 사진을 찍어 두었다. 그런데 그날도 그 아저씨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구글 평점에 남기려고 소심하게 사진을 찍으며 생각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열받지만 가게 정보는 밝히지 않기로 했다. 그 아저씨는 뭔가 집안에 우환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친절할 때가 없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처음으로 산 빵이. 그런 열받는 빵이었다니.
그 후로도 한동안 째려보기만 할 뿐 별로 뭘 사고 싶지 않던 그렇고 그런 중앙역.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추적추적 내려 역 안으로 들어가 버스를 잠시 기다리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Der Bäcker Eifler 빵집이 눈에 띄었다. 노란색 간판에 붉은 글씨. 확실히 다른 빵집들에 비해 현지인들이 끊임없이 들어가고 나오고 있었다. 살짝 들여다보니 빵들이 꽤 그럴싸해 보이는 거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의 Der Bäcker Eifler 빵집.
줄 선 사람들 뒤에 서서 빠르게 빵을 스캔하고 주문을 했다.
그런데 빵 이름에 긴장했던 미간이 펴지면서 슬며시 미소 지어진다. "안나 이모"의 빵.
빵이름이 안나이모라니...
유독 무뚝뚝한 독일에서 상상도 못 한 친숙한 이모 빵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허를 찔린 듯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화가 많은 아저씨에게 상처받았던 마음이 이내 좀 치유가 되는 느낌이랄까?
중앙역에만 있는 빵집이 아니라 88개가 넘는 체인점으로써, 1912년부터 시작하여 약 100여 년의 시간 동안 4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빵집이다. 이런 곳에서 안나이모가 만든 빵 하나쯤 있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이모의 빵은 호밀이 92%, 밀 8%, 천연사우어도우 첨가 빵이다. 호밀이 대부분인 빵이라 역시나 신맛이 훅 치고 들어온다. 1kg이나 되는 빵을 품에 안고 나오는데, 누군가 안아주는 푸근함이 느껴지게 하는 이 묵직한 빵 한 덩이. 이게 독일의 빵인 게지. 어느 집이나 하나 둘 쯤 있을 이모, 고모가 만들었을 그 빵.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기도, 또 서로 낯설기 때문에 벌어지는 많은 상황들에서 때로는 상처받고 때로는 위로받고 하는 타향살이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녹록지는 않네.
안나 이모 빵 덕분에 중앙역의 언짢았던 기억을 훈훈하게 마무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정말.
한 때 열렬히 애정했던 드라마 중 하나인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삼순이의 독백을 늘 마음 한편에 품고 일상을 살아간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얼마큼 더 나이 들어야 단단해지는 것인가?
극 T인 친구가 말한다. 심장 딱딱해지면 죽어. ^^;; 맞네. 맞아. 심장은 늘 따뜻하게 뛰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