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알카라즈의 우승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노박 조코비치. 일명 ’페나조’라 불리는 테니스 고인물. 여기에 앤디 머레이까지 합해 이들 빅4는 지난 20여년 간 윔블던을 장악해왔다. 누가 균열을 낼 것인가. 치치파스, 하차노프, 메드베데프, 즈베레프, 정현 등 ‘페나조’를 꺾어본 경험이 있는 ‘넥스트 제너레이션’들에 기대가 모아졌지만 이내 빅4의 발목에 잡혔다. 물론 고인물들의 빈틈없는 플레이와 그들이 쌓는 역사는 매번 경이로웠지만, 지겨울 지경에 이른 그랜드 슬램에 새로운 얼굴은 꼭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2023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새로운 별이 떴다. 2003년생 스페인 출신 스무살의 카를로스 알카라즈. 그가 노박 조코비치를 누르고 우승컵을 껴안았다. 윔블던 4연패 및 34연승 행진이라는 조코비치의 대기록은 멈췄다. 조코비치는 준우승에게 수여되는 은쟁반을 들고 멋쩍게 웃었다.
알카라즈와 조코비치는 이미 상대로 만난 경험이 있다. 불과 한 달 전, 2023롤랑가로스 4강에서다. 당시 둘의 대진이 완성되자 전세계 테니스 팬들은 들끓었다. 신과 구의 대결은 곧 개화파와 척화파의 대결이었다. 테니스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안 되어있는가. 경기가 열리는 프랑스 현지 분위기는 더 뜨거웠다. 기차, 버스, 길거리, 상점 등 지나다니는 평범한 모든 곳에서 ‘조코비치vs알카라즈’ 이야기가 들렸다.
그러나 해당 경기는 조금 허탈하게 끝났다. 1대1 상황에서 3세트 중반, 오른쪽 다리에 근육 경련이 일어난 알카라즈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제대로 뛰지 못하는 상황에서 3세트와 4세트 점수를 쉽게 내어주머 아쉽게 패했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 같던 경기장 분위기는 빠르게 식었다. 이 후 조코비치는 역시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가장 아쉬운 사람은 알카라즈 본인이었을 거다. 그러니 이번 2023 윔블던 결승 무대에 오른 알카라즈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동공은 흔들렸고 스윙도 흔들렸다. 알카라즈의 전매 특허 드롭샷은 네트를 넘어가질 못했고, 스트록은 조금씩 라인을 벗어 나갔다. 다소 성급해 보였고 찬스볼 마저 잡아내지 못했다. 5대0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한 세트 따라잡았고, 6대1로 조코비치에게 첫 세트를 내어줬다. ‘어우조’. 어차피 우승은 조코비치일 게 뻔했다.
쉬는 시간. 알카라즈는 멘탈을 다잡은듯 했다. 2세트의 모습은 1세트와 전혀 달랐다. 강력한 포핸드로 코스를 이리저리 빼며 상대를 흔들었고, 공에 회전을 많이 걸어 까다로운 플레이를 했다. 침착했던 조코비치가 흔들렸다. 수비에 힘을 뒀지만 공격이 너무 셌다. 타이브레이크까지 끌고 갔지만 알카라즈는 강력한 서브와 코스 유인으로 2세트를 따냈다. 경기는 다시 원점이 됐다.
긴장이 풀린듯한 알카리즈는 3세트에선 날아다녔다. 조코비치의 서브에 브레이크를 성공한 뒤 3대1로 게임스코어를 앞세웠고, 13번째의 듀스 접전 끝에 게임을 따내며 세트스코어 2대1로 역전했다. 조코비치는 분노하며 라켓을 네트 기둥에 내리쳐 부수기까지 했다. 하지만 4세트에서는 알카라스의 서브를 브레이크 하며 전체 세트 스코어 2대2의 동점을 만들어냈다.
결국 승부처가 된 5세트. 경기 시간은 세 시간이 넘어 갔지만 두 선수의 파워는 여전했다. 특히 알카즈는 힘이 넘쳤다. 코트 양 사이드를 종횡무진하며 모든 코트를 커버했고, 상대의 예측을 빼앗는 드롭샷과 영리한 로브로 환호를 자아냈다. 결국 마지막에 날린 강력한 포핸드 샷에 조코비치는 디펜스에 실패했고, 공은 조코비치 사이드에서 멈췄다. 테니스 세대 교체를 공식화 하는 순간이었다.
스무살을 갓 넘긴 스페인 신성. 그의 대관식에서 조코비치는 “완벽한 선수”라 축하했다. 본인과 비슷한 슬라이딩 백핸드를 구사하면서 수비와 적응력까지 닮았다고 평했다. 나달과 페더러의 강점까지 갖고 있어 “알카리즈 같은 선수와 경기해본 적이 없다”며 상대의 실력에 박수를 보냈다. 알카라즈는 “윔블던 센터코트 무패 행진을 이어가던 조코비치를 꺾은 사람이 된 건 놀라운 일”이라며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새로운 테니스 세대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승리”라고 했지만 “차세대 선수들이 조코비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에게 좋은 일“이라 평했다. 알카라즈의 승리는 강력한 챔피언들 앞에서 고전하는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승리이기도 했다.
새로운 테니스 시대를 이끄는 선봉장 뒤에는 야닉 시너, 홀거 루네, 캐스퍼 루드 등 또래 선수는 물론 베르티니, 유뱅크스, 닉 키리오스 등의 주목받는 스타들이 있다. 알카라즈는 이들과 함께 새 시대를 얼마나 오래 가져갈 것인가. 어쩌면 16세 차이의 조코비치와 알카라즈가 한 무대에 섰던 것처럼 알카라즈도 아래로 16세 차이나는 또다른 선수와 한 무대에 설 지도 모른다. 알카라즈는 이제 US오픈 2연패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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