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외로움이 두렵지 않은 이유

외로움과 친해지는 방법 (feat. 태국 꼬창 섬에서의 추억)

by 기록하는 슬기

며칠 동안 우리 동네에는 비가 줄곧 내렸다. 요즘에는 외출도 거의 하지 않는 데다가 기온이 크게 높지 않아서인지 창문 곁에서 바라보는 빗줄기, 들려오는 빗소리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가 간간히 세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내 이마에 닿을 때면 손바닥으로 이마에 묻은 얇은 빗방울을 훔쳐낸 후 회색빛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나는 내방의 창문을 닫으며 작은 목소리로 "꼭 태국 우기 같네.."라는 말을 했다.



3년 전 떠났던 장기여행 중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 '가장 그리운 순간'을 지금 바로 생각해보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몇 개의 장면들이 있다. 그 장면들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본다. 나는 누군가와 누군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것을 나눠 먹으며 끊임없이 웃고 있다. 그런데 어느 한 장면 속 나는 유독 외로워 보인다. 말 그대로 그 속에 나는 혼자다. 한국인 여행자는 물론이고, 외국인 여행자도, 그 누구도 주변에는 없다. 드넓은 모래사장 한가운데 하나의 작은 점처럼 홀로 서있다. 그리고 그 장면 속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다.

"아.. 외로워.."




P20170530_102602122_92098021-7E62-4467-BFD8-4D8E47266DC9.JPG 하염없이 비 오는 날 유독 외로웠던 내가 떠오른다. <2017. 05. 꼬창 가는 버스 안>



바로 그 장면 속의 배경은 태국 동남부에 위치한 '꼬창 (Ko Chang)'이라는 섬이다. 꼬창은 원래 내 여행 계획에는 없던 곳이었다. 꼬창에 가기 전 방콕의 한 한인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고 나서 급하게 정해진 여행지였다. 당시 머물고 있던 게스트 하우스에서 분명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매일 밤 여기가 한국인지 태국인지 모를 정도로 맛있는 한식 안주에 소주, 맥주까지.. 정말 많이 웃고 마셨었다. 그런데 그 숙소를 찾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직장인이나 대학생 등 짧은 휴가를 만들어 나온 단기 여행자들이었다. 하루, 이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정이 들 때쯤 그들은 일상으로 홀연히 떠나버렸다.


당시 장기 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되었을 때라서 매일 겪어야 하는 만남과 이별이 내겐 익숙하지 않았다. 새로운 만남은 수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 줬지만 늘 이별은 나를 허무하게 만들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어딘가에 구멍 난 가슴에 온갖 감정들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잠시 기뻤고 행복했고 황홀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때 본능적으로 느꼈다. 떠나야겠다고. 이번에는 아무런 만남도, 이별도, 그 무엇도 없는 곳으로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정한 곳이 꼬창이라는 섬이었다. 우리나라 여행자들보다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당시 우기였기에 꼬창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방콕에서 꼬창 섬으로 가는 방법만 찾아놓고 무작정 배낭에 다시 짐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그렇게 아무 정보도 없이 출발했지만 꼬창을 갈 운명이었는지 버스 시간도, 배 시간도 자로 잰 듯 딱딱 맞아떨어졌다. 방콕에서 출발한 지 8시간이 훌쩍 지나 꼬창이라는 섬에 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꼬창에 있는 동안 단 하루만 빼고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그리고 덕분에 정말 여행자는 눈 비비고 찾아야 한 두 '커플' 정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곳을 오려던 목적은 완벽하게 달성한 것이었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 그리고 새롭게 어떤 인연도 만들지 않아도 되는 곳.

그래서 어떤 만남도 이별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곳.



DSC02447.JPG 막상 혼자가 되고 나니 밀려올 외로움에 덜컥 겁이 났다. <2017. 05. 태국 꼬창 화이트 비치>



도착한 첫날과 둘째 날은 꼬창 페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 기본적인 편의시설이 몰려있는 화이트 비치에서 지냈다. 그다음 날은 숙소 몇 개만 덩그러니 있던 클롱프라오 비치, 마지막으로는 이름부터 내 마음에 쏙 들었던, '론리 비치 (Lonely beach)'에서 머물렀다. 이 중 어느 곳이 가장 좋았냐고 물어본다면 이미 답은 알고 계시겠지만 론리 비치였다.


론리 비치라는 해변의 이름은 원래 타남 비치라는 명칭이 있지만 외로운 청춘들이 찾아오는 바닷가라고 알려지면서 이제는 문자 그대로 론리 비치라고 불리는 곳이다. 사실 꼬창이라는 섬을 갈지 말지 고민할 때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단지 해변가 이름이 '론리 (Lonely)'라는 이유로.


특히 론리 비치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굵직한 빗줄기가 하염없이 내렸었다. 혼자 지내는 방갈로의 큰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꼭 그 강풍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태국 섬의 우기라는 거야."라고. 덕분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독채 방갈로에서 홀로 음악과 맥주와 보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내게 왜 하필이면 꼬창에서의 그런 기억이 지금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 '가장 그리운 순간'으로 떠오르냐고 되물을 수 있다.


맞다. 그 당시 나는 정말 외로웠었다.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다고, 그런 시간이 내게 필요하다고 떠난 곳이었지만 솔직히 그때 나는 남몰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나와 비슷하게 외로움을 찾아 이 곳에 온 누군가를. 그래서 그 누군가와 우연히 길에서 마주쳐 서로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맥주를 나눠 마시며 이 쓸쓸한 바닷가를 함께 걷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국 난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드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외롭다.', '쓸쓸하다.'라고 말하면서도 난 외로운 내가, 쓸쓸한 내가 싫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때 나는 감히 이런 미래를 예상하기까지 했었다.

'지금은 너무 외롭고, 재미도 없고, 울적하지만 왠지 이곳을 떠나고, 이 여행이 모두 끝나고 나면 왠지 나는 지금, 이곳의 나를 너무 그리워할 것 같아.'라고.




DSC02492.JPG 저기 보이는 파도가, 구름 가득 낀 하늘이, 이름 모를 작은 섬들이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You are lonely." <2017. 05 꼬창 론리 비치>




정말 그 예상대로 3년 후인 현재까지도 회색빛 무거운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볼 때,

제법 굵직한 빗방울들이 땅에 닿으며 만들어내는 소리, 냄새를 듣고 맡을 때,

문득문득 꼬창에서의 그 기억과 감정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나는 결국

누구인지도, 언제인지도 모를 어떤 사람과 어떤 때를 그리워하던 나를,

나와 닮은 외로움과 쓸쓸함이 두 눈에 그렁그렁 맺혀있는 누군가를 남몰래 기다리던 나를,

하늘에서 쉼 없이 내리는 빗방울처럼 하염없이 내리던 외로움, 쓸쓸함을 그저 맨 몸으로 받아내고 있던 나를,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내가 싫지 않았던 나를,

그리워한다.






몇 년 전 낯선 길 위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고, 그리고 여전히 외로움과 동거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를 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그때 나는 그 외로움이 싫지만은 않았는지, 외로움에 온 몸이 젖어도 기꺼이 그것들을 다 받아냈었는지를.


그건 바로 외로움만이 줄 수 있는 묘한 애틋함, 아련함, 그리움을 이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런 감정을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 그 이전에 내가 잠시 잊고 있던 것이 하나 있다.

우리는 외로움이 당연한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외로움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그 마음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외로움이 찾아올 때면 무조건 피할 생각부터 하지 말자.

분명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외로움을 즐길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P20170603_121239530_5BC94228-CF5F-448F-ABB3-7D0C3CB42E31.JPG 지독히도 외로웠지만 그만큼 그리운 꼬창. 꼭 다시 갈게. 그땐 그곳에서 받은 애틋함과 그리움을 가득 안고. <2017. 06. 꼬창 떠나는 날>








오늘도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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