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잘 줄 수 있는 법.
지난 11월, 제주에 내려오자마자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해준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3년 전 세계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 네팔 포카라에서 만났던 친구 중 한 명이다. 막상 포카라에서 지낼 때는 그 친구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었지만 이상하게 그 친구의 기억이 좋았었다. 각자 한국으로 돌아간 시기가 달라서 sns를 통해 간간히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 친구의 계정에는 제주도에서 살아보겠다는 글이 뜬금없이 올라왔었다. 그게 벌써 1년 하고도 6개월 전이다. 그렇게 친구는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제주 살이'를 시작했었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며칠 전에는 친구의 집으로 초대를 받아 그동안 못 나눈 이야기를 밤새워 나누고 왔다. 내가 sns를 통해 봤던 친구의 제주 생활과 내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친구의 시간은 생각보다 고단했고 참 길었다. 아주 다행히 그녀가 제주에 내려오고 1년을 채워갈 때쯤 새롭게 들어간 회사가 괜찮았고, 그즈음 만난 남자 친구와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서 안정적인 일상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는 이제부터 차근히 준비를 해서 제주에서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했다. 친구가 예전부터 옷을 만들어하고 싶었던 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꿈? 너 그 옷 만드는 일 말하는 거지? 제주도에서 원래 플리마켓도 많이 열리잖아. 나중에 코로나 괜찮아지면 네가 만든 옷도 가지고 나가면 정말 좋겠다.."
"아 맞아. 옷 만드는 것도 꿈 중에 하나야. 근데 내가 말하려던 꿈은 제주도에서 구옥을 사는 거야. 마당이 넓은 제주도 구옥을 개조해서 그 마당에서 주말이면 플리마켓을 열고, 네 말처럼 내가 만든 옷을 팔아보고 싶어. (제주도의 구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바깥채야. 안채는 내가 쓰는 공간이고, 바깥채는 슬기 너 같이 내가 집에 초대한 친구들, 사실 꼭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라도 사람들이 제주에 왔다가 편하게 들려서 쉬고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그 공간을 가장 예쁘고 아늑하게 꾸미고 싶어. 게스트 하우스 이런 거 절대 아니고, 돈 받고 그런 거 말고. 그냥 육지에서 힘들 때 짧게라도 왔다가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그러니까 사랑방 같은 건데 편하게 쉬고 갈 수 있고, 자고 갈 수도 있는 그런 공간인 거네? 와.. 멋지다.. 그런 공간을 지금부터 생각하는 그 마음이.. 대단하다 정말."
물론 친한 친구가 내가 있는 지역에 왔는데 하룻밤을 재워 줄 수 있는 건 그렇게 큰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공간, 내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타인에게 공간과 시간을 내어주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딱 하루, 이틀 같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먼저 자신의 공간에 미리 타인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그 친구의 마음 와 닿는 순간 내 마음이 보였다.
만약에 내가 제주에 구옥이나 새 집을 마련하게 된다면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게스트 룸'과 같은 공간은 계획조차 하지 않을 것 같다. 집이 너~무 커서 방이 한두 개 남아돈다면 모를까. 굳이 누가 올지도 모르는 그 공간을 가장 공들여서 꾸미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을 것 같다. 물론 이런 점은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른 점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나는 내 친구의 그런 점을 배우고 싶었다.
나는 나의 공간, 나의 시간이 중요해서인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도 항상 그 상대방의 공간, 시간에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그래서 그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그 선을 잘 지키는 편이다. 하지만 그 선을 너무 잘 지키다 보니 가끔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정이 없는 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인지 내 마음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늘 넓지 못하고 유연하지 못하다. 이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장점이라면 장점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아쉬운 점도 많다.
사실 친구는 제주에 오자마자 마땅한 방을 구하지 못했던 나에게 계속해서 지금 자신이 지내고 있는 집에서 머물면서 방을 천천히 알아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가 혼자 지내는 공간에 들어가 며칠 신세를 진다는 게 영 마음이 편치 않은 나는 고맙지만 괜찮다고 여러 번 거절을 했었다. 반복되는 거절의 마지막 즈음, 친구는 진지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한 번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슬기야. 너무 그렇게 다 거절하지 않아도 돼.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받을 줄도 알아야 되는 것 같아. 네가 생활하는 부분이 불편해서 거절하는 거면 상관없는데, 괜히 나 때문에 거절하는 거라면 진짜 나는 괜찮아! 알겠지? 그리고 다음에 언제든 너 오갈 때 없으면 머물다 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생각해보니 이때도 친구가 했던 말 중에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그 말이 나를 뜨끔하게 만들었었다. 맞다. 타인의 좋은 마음과 표현을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반대로 그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고, 잘 베풀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늘 적정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주고받았던 것 같다. 깊은 사이가 아니라면 머릿속으로는 어느 정도 계산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함께 만나 소비했던 금액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과 내 마음을 비교하며 계속해서 내 마음을 관리하며 단속해왔던 것 같다. 이미 좁은 마음 가지고 있는 나였음에도, 그 안에서도 조금이라도 덜 마음을 쓰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미리 다른 사람들의 공간을 내어주고 싶다는 친구를 보며 그동안 나는 내 공간뿐만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도 얼마나 남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했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 말처럼, 이제는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말은 즉, 진심으로 나의 마음과 나의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아직은 새집을 사서 손님방을 먼저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안되지만 누가 오더라도 흔쾌히 맞이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동시에 이미 작은 마음을 자꾸만 재고 따지면서 쪼개고 나누는 그런 얄팍한 사람은 더욱 되지 말하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고 느껴주시는 독자분들 덕분에 매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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