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가 알려준 연말의 의미

#14. 여러분들에게 '연말'이란?

by 기록하는 슬기

최근 2~3주 동안 거의 혼자 있어서 그런지 길거리를 걸을 때나 식당에 갔을 때나 주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본의 아니게 너무도 잘 들렸다. 그리고 요 며칠간 반복되는 재미있는 공통된 대화 패턴을 발견했다.


A : 아.. 그럼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뭐하냐..

B : 집에 있어야지 뭐.. 근데 너 작년 크리스마스 때는 뭐했어?

A : 작년 크리스마스?? 나 뭐했지? 집에 있었나? 별 거 안 했을 걸..?


이 대화가 유독 내 귀에 잘 꽂혔던 건 아마도 나와 너무 똑같은 상황이자 생각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막상 작년이나 재작년을 돌아보면 연말에 특별히 뭔가를 했던 기억은 없는데 이번 연도 연말은 괜스레 더 아쉽게만 느껴지는 이 마음은 다들 같나 보다.




대부분 이번 연말 계획은 '포기'상태일 것이다. 국내 코로나 19 상황이 진정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는 점점 강력해지고, 우리는 모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서 열심히 방역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코로나 19와 싸워온 지도 1년이 다 되어간다. 아마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연말까지 이렇게 마스크를 쓰고, 백신과 치료제 없이 하루하루 불안한 생활을 할 거라고 감히 상상하지 못했었을 것이다.


'연말'이라는 두 글자만 들으면 떠올려지는 이미지가 있다. 로터리나 큰 대로변에 우두커니 서있는 화려하고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들,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전구들, 그 아래로 또 다른 불빛을 내고 있는 수많은 자동차들, 그리고 각 지역의 시가지 골목골목을 각양각색 다른 색의 코트와 점퍼를 입고 가득 매운 사람들, 그 속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반가워 여기저기 들려오는 하이톤의 목소리.


이렇게 불과 작년만 해도 즐길 수 있던 '연말'의 분위기를 눈을 감고 그려보니 나도 연말을 좋아했고 즐겼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겉으로는 매번 크리스마스, 연말, 연초 이런 게 다 무슨 의미냐고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 누구보다 연말에만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만남을 기다려왔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서 연말을 핑계 삼아 1년에 한 번 볼 수 있던 반가운 사람들과 약속 날짜가 잡히면 그때부터 설레어하던 나였다. 겨울은 무지 싫어하면서도 입김이 나는 한겨울의 바쁜 거리를 좋아했다. 한동안 오들오들 떨다가 온풍기가 빵빵하게 틀어져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느낄 수 있는 뜨끈 뜨근한 그 텁텁한 바람을 좋아했다. 분명 서로 막차 시간까지만 놀자던 약속이 금세 첫차 시간으로 바뀌는 그 만남을 생각보다 나는 많이 좋아했었나 보다.



강남역.jpg 이제 사람 많다고 짜증 내지 않을게요. 누가 치고 갔다고 짜증 내지 않을게요. <2년 전, 12월 마지막 주 주말. 강남역>




만약에 이번 연도에 코로나 19가 없었다면, 그래서 평소처럼 연말의 분위기를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면 나는 아마 속으로 그랬을 것이다. '연말이 뭐 별거 있나..? 왜 다들 신난 거야?'라고 생각하고 나는 연말 따위 상관없다며 한껏 시니컬한 척을 하고 있었을 거다. 그러면서 12월은 주말마다 바쁘게 강남역으로 올라가 그동안 못 봤던 사람들과 만나서 신나게 웃고 마시고 또다시 실실실 웃고 있었겠지. 그러고 보니 그야말로 언행불이치였다.


이번 코로나 19를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정말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었어."라고. 나도 그 말에 적극 동감한다. 지난 11개월 동안 매일같이 일상의 소중함을 느껴왔고, 지금도 느끼고 있지만 특히 연말이 되니 더욱 지난 연말의 일상이 그리워진다. 이렇게 쌀쌀한 겨울날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겨우겨우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고 멀리서 반갑게 조금 큰 목소리와 큰 체스처로 인사를 나누던 그 장면이 그립다. 정확히는 그 장면 속 그 사람들이 그립다. 그리고 보고 싶다. 이제와 보니 내게 '연말'이란 곧,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왔고, 그 누구보다 좋아했던 것이다.






이곳 제주 서귀포의 로터리에도 밤이면 커다란 나무들에서 주황빛, 핑크빛, 초록빛이 반짝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그 빛은 밝고 또렷해서 멀리에서도 한눈에 이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동차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면 이곳은 여전한 연말인데 쌀쌀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 곳에서 바라보면 이곳은 전혀 연말이 아니다. 길거리에는 마스크를 쓴 아무 말 없는, 아무 표정 없는 시민들만 지나갈 뿐이다.



진심으로 바라고 바라본다.

이제는 충분히 일상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깨달았고 지금도 매 순간 뼛속까지 깨닫고 있으니, 이렇게 우리의 일상을 2020년 한 해만 빼앗아가길.

2021년에는 차근차근 우리의 예전 일상과 새로운 일상이 조화롭게 자리 잡을 수 있길.

내년 연말에는 코끝이 시려지는 이 계절에 볼 수 있던 그 사람들을 조금은 시끄럽고 정신없는 거리에서, 수많은 웃는 표정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길.

그때까지 모두 건강히 안전히 지낼 수 있길.

부디.








마지막으로 제가 정말 좋아했던 호주의 썸머 크리스마스, 그 일상 사진 몇 장 보여드릴게요 : )

(2018년, 호주 퍼스에서 지낼 때 찍은 사진이에요.)



P20181203_151304750_44DF0827-AE36-49BB-8622-753F6C8F2515.JPG 사진을 찍던 당시 38도에 육박하던 뜨겁던 날이었어요. 그런데 멀리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딱..! 이게 바로 '썸머 크리스마스구나' 했던 기억이 나요.




P20181203_155832530_CAF1F9F9-9C35-476E-A194-76607103E570ddd.jpg 다들 짧고 얇은 옷 입고 있는 거 보이시죠? 그리고 거리 중간에는 총총총 크리스마스 장식이 제겐 너무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P20181202_172022902_3BAEB58F-F591-47AA-9B1A-4EE59960B1F9.JPG 마지막으로는,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는 귀여운 산타 할아버지! ㅎㅎㅎㅎㅎ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에요.




요즘 들어 더 답답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제 글과 함께 하는 이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내 마음 같아 공감하실 수 있고, 아주 작고 희미한 미소라도 지으실 수 있기를 바라요.







오늘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글을 찾아주시고 읽어주시는 독자분들 덕분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이 자리에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항상 고맙고 고맙습니다.

: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