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누구 덕분이 아니라 이미 당신은 준비된 사람이라서.
2020년 이번 연도는 모두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기억되지 않을까. 코로나 19가 개개인에게 끼친 피해의 규모와 분야는 감히 가늠할 수 조차 없다. 이 사태 속에서 내 최측근들 또한 각기 다른 이유들로 고생을 많이 했다. 물론 지금 코로나 19의 확산 상황만 놓고 보자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지만 내 주변을 포함하여 나 또한 코로나 19가 출현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3~4월에 가장 심적으로는 힘들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전염병에 의해 그전에 준비했던 모든 계획들이 강제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중 나와 친한 한 동생은 오래전부터 꿈이었던 영국 유학을 준비하느라 2~3년 동안 열심히 돈을 모았고, 코로나 19가 출현하기 직전 작년 12월에 퇴사를 마친 상태였다. 당시 동생은 영국에 가기 위해 비자 등 관련 서류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즈음 여러 이유들로 인해 오래 사귀던 남자 친구와 이별을 했고,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하필이면 그때 가장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도 틀어졌다. 그 일들이 터지고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 19라는 말도 안 되는 전염병이 전 세계로 퍼졌고 그녀의 꿈이었던 영국행 또한 없던 일이 돼버렸다. 이때 동생에게는 코로나 블루라기보다 코로나 패닉이 와버린 것이다.
동생과 나는 코로나 19 이전에도 살고 있는 곳이 멀어서 1년에 두세 번뿐이 만나지 못했었는데,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가 만나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힘들어하고 있는 동생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끔 전화로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동생이 가장 힘들어할 때는 일부러 연락을 먼저 하지 않고 기다렸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지만 나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고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기에 일단은 조금 나아지기를 기다렸었다. 특히 힘든 이야기를 나눌 때는 듣는 사람의 마음이 준비가 됐는지도 중요하지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그 말을 할 준비가 된 상태인지도 중요하기 때문에.
아마 동생에게는 이번 연도 봄은 어느 계절보다 잔인한 봄이었을 것이다. 그런 봄이 지나가고 하루의 해가 점점 길어지며 온도와 습도를 가리키는 숫자가 높아질 무렵, 어느 초 여름날이었다.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행히도 동생의 목소리도 말투도 예전보다는 많이 정돈된 듯했다. 동생은 그동안 있던 일과 그 일을 견뎌냈던 과정들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물론 내게 들은 것은 그녀가 겪어냈던 수많은 장면들 속에 한 두 컷 밖에 되지 않겠지만 처음 겪는 상황과 그에 따른 감정으로 인해 많이 힘들어한 것이 음성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졌다. 그날 우리는 3시간이 넘도록 전화 통화를 했다.
동생은 가끔 생각을 정리할 때 일기 형식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는데, 우리가 전화했던 날 바로 새 글이 올라왔다. 전반적으로 그동안의 겪었던 일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 적은 글이었다. 그리고 그 글 마지막 즈음에는 내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나와 통화로나마 대화를 나눠서 덕분에 마음이 정리가 된 것 같다며 내게 고마움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동생은 내 블로그에 비밀 댓글로 이런 글을 남겼다.
"언니, 저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요. 이번 일 겪어내고 이렇게 괜찮아지는 데 알게 모르게 언니 몫이 정말 컸던 것 같아요. 아니다, 그냥 대놓고 언니 덕분이죠. 정말 고마워요 언니!"
동생의 글과 댓글을 읽고 딱 처음에 느낀 감정은 정말 고마움이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거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그 마음을 알아주려고 노력했던 내 정성을 알아준다는 것 자체로 나는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동생의 댓글에 괜찮아졌다니 다행이라는 말 함께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덧붙여 보고 싶다는 말도.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번에 힘든 일을 겪고, 딛고 일어설 수 있던 것은 내 덕이 아니었다. 이미 동생은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일어날 준비가 되었기에 나와 통화할 때 그 대화 내용이 귀에 들어왔고 머리와 마음으로 이해를 했던 것이다. 만약 동생이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고, 다시 일어날 자신의 의지가 없었다면 아무리 내가 아닌 엄청난 상담가 혹은 멘토와 대화를 나눈다고 할지라도 그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맞아요." 할지라도 전화를 딱 끊는 순간 나눴던 대화들은 공기 속으로 증발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 힘든 일을 겪은 것도 그 동생이었고, 스스로 다시 극복한 것도 동생 자신이었다. 내가 해준 말이, 나와 나눴던 대화가 동생에 마음에 와 닿아 위로가 되었고, 용기가 되었다는 건 이미 동생은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내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다. 하지만 정말 내 인생과 내 마음을 책임지고 사는 사람은 나이기에 나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우선이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이 전해주는 마음의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 훌륭한 작가의 한 문장이 내 마음에 힘을 줬다는 건 이미 그 힘을 받을 수 있는 그 이상의 힘을 지닌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라는 뜻 아닐까.
그때 그 동생에게, 그리고 지금 서서히 누군가의 위로와 용기를 받고 극복하는 과정인 분들에게 감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누군가의 한 마디를 듣고 마음이 따뜻해진다면,
누군가의 한 마디를 듣고 양 손에 힘이 쥐어진다면,
누군가의 한 마디를 듣고 이제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느끼셨다면,
그건 이미 당신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당신은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극복할 수 있는 단단한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뜻일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당신을 믿으면 돼요.
당신은 이미 충분합니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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