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 사랑 앞에서 자꾸만 도망가고 싶은 나와 당신의 일기
몇 주 전, 오랜만에 양쪽 엄지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친한 언니와 메시지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언니는 갑자기 궁금하다며 그 사람의 안부를 물어왔다.
"슬기야, OOO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 잘 지내나?"
내 글 속에 자주 등장하는 그 사람, 나의 옛 연인의 안부를 물어왔다. 내가 그 사람과 연애할 시절, 언니와 나는 한 집에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언니는 나와 그 사람의 연애를 시작부터 지켜본 장본인이다. 2년 전, 장기여행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와 이별했고 그 소식을 언니에게 메시지로 전했었다. 당시에 언니는 한편으로는 예상은 했지만 나보고 역시 독하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유독 그 사람 생각이 자꾸만 났고, 보고 싶었고, 연락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게 멋진 이별인 줄 알았다. 내가 독하게 하지 않으면 내 선택을 후회하는 것 만 같아서 일부러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티를 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지난 7월부터 거의 절정을 달렸다. 몇 년을 참아와서 그런지 한번 터져버린 그리움, 후회라는 감정이 꽤 깊게 아프게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언니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히 말했다.
"언니, 사실 한국에 오고 자꾸 그 사람 생각이 자주 나고 그랬었는데 얼마 전에 연락하고 나서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냥 제가 한국에서 아프기도 했고, 상황도 안 좋고.. 그래서 그리운 거 겠죠? 이 감정도 다 지나가겠죠?"
언니는 대답했다.
"응.. 그렇지. 당연히 생각나지. 근데 너 다시 만나는 거 진지하게 상상해보면 그건 아니지 않아..? 그건 확실하잖아."
음.. 맞다. 아닌 건 아닌 건데, 솔직히 '확실히' 아닌 것까지는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머리로 생각하면 아니지만, 이별 후의 기억은 미화의 과정을 거쳐 좋았던 추억만 데리고 오니 자꾸만 헷갈렸다. 그리고 나는 언니에게 이런 내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고 온갖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정작 언니는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묻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맞죠.. 언니.. 아니 저는 여행하면서 사귈 자신이 없더라고요. 여행하다 보면 계속 시차도 달라지고, 제가 패키지여행도 아니고 배낭여행에, 열악한 환경으로 자주 가는데.. 인터넷 안 되는 동네도 많을 거고.. 그러면 또 계속 저는 여행 속에서도 스트레스받고 상대방은 더 걱정하고 그러잖아요. 제가 몇 년을 준비한 세계여행인데.. 그리고 그 사람도 그런 식으로 저 한국에서 기다리면서 좋은 기회를 놓질 것 같았어요. 그 사람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그냥 제가 먼저 빨리 손을 놓는 게 맞는 것 같았어요. 저를 위해, 그 사람을 위해.."
그 후 언니의 한마디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던 내 엄지 손가락을 몇 초간 멈추게 만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네가 여행하면서 사귈 자신이 없던 게 아니라 그 아이는 너에게 끝이 보이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
'끝이 보이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에 묵직한 바위처럼 툭 하고 떨어졌다.
참 슬픈 단어였는데 어쩐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 같았다. 언니 말은 즉슨, 내가 그 사람과 끝까지 갈 생각을 했다면 내가 꼭 그 시기에 여행을 떠났었을까, 둘이 함께하는 방법이든 내가 더 빨리 오든 다른 해결방안을 통해 그 관계를 지키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언니는 한마디를 더 했다.
"이미 네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그 사람과 언젠가는 헤어질 것임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 사람으로부터 멀리 여행을 간 것 아닐까.. 네가 얼마나 그 여행을 가고 싶어 했는지는 알지만, 그래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어.."
맞다. 이미 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 감정의 민낯을 바라 볼 자신이 없어 어떻게든 겉에 화장을 하고, 또 덧바르고 색칠을 해왔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그 모습이 잠시 진짜 내 모습이라 속여왔던 것이다. 그날 언니가 해준 저 한마디가 그동안 두꺼운 화장 밑으로 숨겨왔던 내 민낯을 예고 없이 두 눈에 데려다 놓았다.
난 그 사람과 이별의 이유를 '여행', '내 꿈'이라는 그럴싸한 것들로 감춰보려 했지만 결국은 나는 한없이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나를 위해, 그를 위한다고 하고 결국은 나만을 생각했던 거다. 겉으로는 '낭만'을 외치고 '지금'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난 누구보다도 '현실'이 두려웠고 '미래'가 중요했다.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했던 것들만 바라봤다.
내 나이 서른, 그리고 여행을 가기 전 나이 스물여덟.
사람을 만날 때 나는 늘 '사람' 그 자체를 본다고 자부했다. 다른 또래 친구들이 '조건'과 '행복'을 직결시켜 '결혼'을 논할 때 나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척을 해오며 속으로 그들을 비난했다. 어쩌면 나는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라 그저 외면해왔던 것이다. '결혼'이 사랑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지만 결국은 나도 늘 깊은 곳 어딘가에서 '사회가 원하는 결혼'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그 사람을 멋대로 밀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그때 나는 겁쟁이 었고, 위선자였다.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라는 것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결혼이라는 계약을 한다고 사람 마음이 저절로 평생 그 사람만을 바라보게 되지는 않으니까. 사실 점점 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한계성만 짙게 보인다. '결혼'이란 것을 꼭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비혼 주의'까지는 아니지만, 결혼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본다. 분명 '선택'은 얻는 것이 있는 만큼 잃는 것도 있기에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난 지금 사랑도, 결혼도 어렵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다들 서른 즈음에 가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기 조차 힘들어하는지를.
다들 이전 연애의 경험 때문인지 사랑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먼저 사랑의 ‘끝'을 함께 맺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겪어보기 전에 아닌 척하고 있지만 이미 머릿속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결혼'이라는 프레임에 맞춰서 상대를 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그 관계가 제대로 시작도 되기 전에 멋대로 상상 속에서 결혼까지 했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아.. 이 사람은 이 부분이 나랑 안 맞을 것 같아.'라고 한다.
1년을 만나 본 것도, 아니 심지어 1개월을 만나 본 것도 아니면서. 이런 패턴이 반복되고 우리는 이미 '사랑'에 지치고,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제 연애 따위, 사랑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는 지키지 못할 다짐을 한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나와 당신은 늘 그랬듯 또다시 외로워진다. 그리고 그리워진다. 그게 누군지도 언제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그리워하고 싶은 것이다.
그건 사랑하고 싶다는 것이다. 곧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끝은 뭘까. ‘결혼’으로 밖에 증명하지 못하는 걸까.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서로를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묶어놓으면 조금은 더 서로에 대해 책임지고 그 의무를 다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들의 사랑의 모양과 깊이는 변해도 깨질 확률은 낮을 것이다. 헤어지지 않는 이상 긴 인생 속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마지막 상대가 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를, 그녀를 사랑한 마음이 누군가가 원하는, 사회가 원하는 결혼을 위한 사랑은 아니었을까. 무엇인가를 위한 사랑, 감정은 아니었을까.
그 사람과의 이별 후 '사랑의 끝이 결혼이라면 나는 어떤 사랑의 결론을 맺고 싶은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름의 작은 결론을 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생긴다면,
먼저 내가 결혼 후 원하는 나의 삶을 그려보자.
그리고 그 사람의 결혼 후 원하는 삶을 들어보자.
각자의 삶을 지켜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인가. 혹시라도 둘 중 누구 한 명의 삶의 큰 부분을 포기하고 다른 한 명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결혼이란 '나의 삶과 상대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의 삶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면서 비슷한 두 개의 삶이 만나 점점 그 교집합을 늘려나가고 다른 삶의 부분은 서로 인정을 해주며 그렇게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그리는 결혼의 삶은 이러하다.
아무리 현실이 무섭고 강할지라도 당사자들의 마음과 의지보다는 덜 강할 것이라 믿는다.
결혼한 사람들이 지금 내 생각을 듣고 "네가 결혼을 안 해봐서 그래. 뭘 모르네. 결혼은 현실이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 말 그대로 난 아직 결혼을 안 해본 사람으로서 이 정도 낭만마저 갖고 있지 않다면 그건 인생이 너무 서글픈 거 아닐까?
어차피 지금 내 인생 충분히 차갑고 힘들다. 결혼한다고 갑자기 핑크빛 따뜻한 일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란 것 잘 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결혼은 힘들고 힘든 삶이 만나 각자 응원해주고 위로해주는 삶인 것이다.
하지만 나도 안다.
여전히 삶도, 사랑도 어렵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숨 쉬는 한 삶을 살아가듯 사랑은 늘 함께 일 것이다.
살아 숨 쉰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
그러니 우리는 사랑할 운명이다.
어차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감히 말해본다.
겁이 나면 겁먹은 채로 그렇게 시작해보자.
이 세상에 모든 것이 그러하듯,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는 법.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자분들의 공감과 응원은 글 쓰는 저에게 가장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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