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했던 구남친이 내게 남겨주고 간 것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해야 하는 이유

by 기록하는 슬기


"그러니까 우리 무슨 사이야? 다시 사귀는 거 맞지?"


헤어진 지 7년이 훌쩍 넘은 B가 내게 물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아니 솔직히는 '절대 너랑은 다시 사귀기 싫다고, 갑자기 이런 걸 왜 물어보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다시 상처주기 힘든 난 꾹 참고 적당한 답을 찾아 두뇌를 풀가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B는 내게 다시 한번 재촉하는 듯 말했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예전처럼 또다시 B와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아 나는 급하게 입을 뗐다.

"어?.. 음.. 이렇게 갑자기 충동적으로 결정하면 안 될 것 같아. 이제 우리 나이도 있고, 우리가 여러 번 사귀었다가 헤어져 본 경험도 있고.. 그러니까.."

B의 표정은 내 이야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저 표정은 내가 B와 지겹게 싸우던 시절 매일 봐야 했던 표정이었다. 7년 만에 저 표정을 보니 온갖 기분 나빴던 기억과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단숨에 이렇게 말해버렸다.

"아니!!! 우리 다시 안 만나!!!! 왜 만나 내가 너를!!"

전보다 더욱 싸늘하게 굳는 B의 표정이 눈에 들어올 때쯤 내 시야에 꽉 찬 건 아이보리색 천장이었다.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꿈이었다.

정확히는 '악몽'에 가까운 꿈이었다.






B는 20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3년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낸 나의 옛 연인이다. B와는 헤어지기 1년 전부터 싸웠다가 다시 사귀는 과정을 지겹게 반복했었기에 막상 '진짜 이별'이 왔을 때 슬프고 아프기보다 드디어 이 지겨운 관계의 늪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후련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주 가끔씩 이렇게 B는 내 꿈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내 꿈속에서 B는 대부분 내가 사귈 때 정말 싫어했던 얼굴 표정과 말투, 행동을 하며 출현한다. 아마 마지막 즈음 매일같이 그와 말다툼하며 봐야만 했던 그 장면이 내 머릿속 어딘가에 아주 깊숙이 박혀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나는 B와 이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B와 연애했었다는 그 자체를 가슴 치며 후회했었다. 그와의 만남에, 그에게 온 마음을 다 했던 '나'와 '내 시간'이 너무도 아까웠다. 아마 B도 연애 끝에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헤어지기 전, 1년 동안 우리는 '헤어지지 못해 사귀는 커플'이자 '헤어지기 위해 사귀는 커플'이었으니.



B와 헤어진 지 어느덧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그를 꿈속에서 만나면 여전히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그와 만났던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거나 후회하고 있지는 않다. 그와 헤어진 후 몇 명의 썸남이 스쳐 지나갔고 구남친들이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내 곁에 머물다 가면서 B와의 연애가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B와 헤어지고 만난 사람들 중에는 B와 만날 때 같이 잦은 다툼을 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이후의 연애는 대부분 순조로웠고, 평화로웠다. 그렇다고 B가 유독 인간성이 나쁘다거나 성격이 괴팍한 것은 절대 아닌데도 말이다. 왜 나는 유독 B와 그렇게도 지칠 때까지 싸워야 했던 걸까?



DSC02469.JPG 늘 어렵지만 늘 원하고 있는 것, '사랑' <사진 : 태국 꼬창 2017. 06>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B와 이별 후 그 연애를 후회했던 이유는 결국 이 모든 문제를 B의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었다. 사귀면서 B가 내게 상처 줬던 일들, 내게 실수했던 일들만 곱씹었기에 그 시절 속에 내가 안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그 연애 시절 속 '내'가 자연스레 제삼자의 입장으로 보였다.

음. 나 또한 참 피곤한 여자 친구였던 것은 틀림없다. 아마 B의 성격상 말 못 하고 참았던 것들이 쌓였었을 것이고, 결국 그렇게 꾹꾹 눌러오던 감정들이 연애 마지막 즈음 하나둘씩 서로에게 폭탄으로 변해 뻥뻥 터져버렸던 것이다.



이제야 조금은 감이 잡힌다. 왜 그렇게 B와는 힘든 연애 생활을 했고, 그다음 연애부터는 차근차근 나아졌는지를. 아마 이 말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없으리라 짐작한다.

"젊었을 때 연애는 많이 할수록 좋아. 그래야 남자(여자) 보는 눈이 생겨."


과연 이 말의 논리대로 연애를 많이 하게 되면서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생겼기 때문에 점점 만족스러운 연애를 할 수 있던 걸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흔히 남자(여자)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야기도 일리가 있지만 끈덕진 연애를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연애는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인 것을.


아무리 절절했던 연애도, 아무리 평생을 기약한 연애도, 아무리 10년을 함께한 연애일지라도, 그 과정과 그 끝에 항상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는 사람은 '나'이다. 그리고 다음 사랑을 하게 될 사람도 '나'다. 그러니 상대방을 알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은 '나'라는 사람이 아닐까.




DSC09459.JPG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진 : 베트남 다낭 2019. 11>




그렇다.
B와의 끈적하고도 끈질긴 연애 끝에 내게 생긴 것은 '나'란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연애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예상치 못하게 자주 마주하게 된다. 마냥 좋은 모습만을 보게 되면 좋겠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스스로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된다. 나의 경우, B의 만남 중에 유독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을 많이 만났었다. 처음에는 그런 나 자신이 싫었고, 그랬기에 '이 사람과 나는 안 맞는다.'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며 '나'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모습이 자주 나오는지,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상대방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표현을 해야 하는지, 만약 그런 모습이 나왔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이 상황과 이 관계를 풀어나가야 할지, 더불어 이런 나의 이런 모습이 덜 나오려면 나와 상대방이 우선적으로 어떤 점이 잘 맞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다음 연애부터는 B와의 연애보다는 덜 삐걱거렸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덜 마주할 수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란 사람의 또 다른 면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그 시절 나와 같이 붙 같이 뜨겁기만 했던 감정을 나눴던 B가 그렇게 밉지는 않다. 오히려 그 어디에서도 못 본 내 민낯을 보게 해 줘서 고맙기도 하다. (물론 꿈속에 대뜸 나와서는 가슴 답~답하게 만드는 그 표정을 지을 때면 B에게 한마디 세게 날리고 싶지만. 후.)



아직은 자발적으로 솔로 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도 가끔 상상은 해본다.

'새로운 연인이 생긴다면 어떤 사람일까?', '그 사람을 만나면 나는 어떤 모습이 될까?'

20대 때 근면 성실하게 연애 생활을 해온 결과, 내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누군가와 사랑을 해서 변하게 되는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라도, 분명한 것은 그때의 내 모습은 나 자신에게 마음에 드는 '내'가 될 것이라는 것.

그래야 그 사람도, 나도 행복하게 건강하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






+)

그러니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지런히 연애를 시도해보고, 시작해봐요!

그 사람과의 결론은 아~무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나'를 조금 더 알아가고, 나와 친해질 거예요.








오늘도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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