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이별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결혼'이란 사랑의 결실일까, 이별의 이유일까.

by 기록하는 슬기


일주일 전쯤이었다. 겨울잠에 빠져있던 내 휴대폰이 대뜸 알림 한 줄을 띄우며 잠에서 깨어났다. 저녁시간에 내게 올 휴대폰 알림은 택배가 발송되었다는 문자 아니면 화장품 회사에서 오는 '2월 한정 세일!'로 시작되는 문자뿐이 없다. 그런데 알림의 출처는 문자가 아닌 한 sns였다. '000 님이 회원님을 팔로우합니다.'라는 한 줄이 떠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블로그나 브런치를 통해 나의 글을 읽어보시고 sns를 팔로우해주시는 분들이 있기에 그런 고마운 분들 중 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림에 떠있는 '000 님'이라는 아이디가 괜스레 눈에 밟혔다.


곧장 나는 000 님의 계정에 들어가 보았다. 아쉽게도 그 계정은 비공개 계정이라 아무런 사진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작은 원형 안에 들어가 있는 프로필 사진만을 보고도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사진은 몇 년 전 내가 찍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계정의 주인공은 약 5년 전, 홀로 배낭여행 중 방콕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E였다. 당시 그 게스트 하우스 1층에서는 매일 밤 여행자들끼리 모여 맥주 파티를 열곤 했는데, 도착한 첫날 E와 나는 우연히 나란히 긴 의자 위에 앉게 되면서 금세 가까워졌었다. 그 자리에서 E 말고도 3명의 언니, 오빠들과 급격히 친해졌었다. 그 후로 우리는 다 함께 국경을 넘어가며 2주 동안 여행을 함께 했었다.


여행 중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항상 내 옆에는 E가 있었다. 2인끼리 앉아서 가야 하는 버스를 탈 때도, 다 같이 택시를 탈 때도, 툭툭이를 탈 때도, 식당에 앉아 밥을 먹을 때도, 그냥 길거리를 걸을 때도 언제나 E는 내 옆자리였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E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나와 비슷한 취향이 점점 내 눈과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지는 건 한 순간이라고 하지만 그 순간을 알아차렸다면 이미 늦은 것이다. <사진은 2014.11 태국 방콕>



여행 기간이 짧았던 E는 나보다 2주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다. 떨어져 있던 동안에도 우리는 매일매일 연락을 했고, 나는 그와 한국에서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부터 우리는 제대로 썸을 타기 시작했다. 연인처럼 매일 연락을 했고, 크리스마스 날, 연말, 주말에는 만나서 드라이브도 하고 함께 밥도 먹고 카페도 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때까지 E는 내게 "(정식적으로) 사귀자."라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나는 E에게 단 한 번도 확실한 그의 표현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우리는 그렇게 자주 만났는데도 손 조차 잡지 않았었다.


나는 주변 친구들과 언니들에게 이 상황을 말했고 조언을 구했다. 그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 의견은 "그 남자 너랑 사귀려는 마음이 없는 거 같은데..? 네가 먼저 끝내자고 해보고 반응을 봐봐. 그랬는데도 널 붙잡지 않는 거면 널 좋아하는 게 아니지." 그다음 의견은 "이건 이미 사귀고 있는 거 아니야? 그래도 답답하면 네가 먼저 사귀자고 해. 누가 먼저 말하는 게 뭐가 중요해."였다. 나는 20살 이후로 단 한 번도 남자에게 먼저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고백은커녕 빼빼로도 먼저 줘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소심하면서 자존심 센 나에게 두 가지 조언 중 조금 더 쉬운 건 후자보다 전자였다.


나는 더 이상 이렇게 헷갈리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고, 어떻게든 그와 결판을 내기로 결심했다. 금요일 저녁 E와 약속을 잡았다. 그날도 평소처럼 E와 나는 맛있는 저녁과 반주로 소주 한 잔을 곁들였다. 소주병은 한 병, 두 병... 늘어갔고 나는 술기운을 빌려 그에게 준비해온 대사를 입 밖으로 꺼내기로 했다.


"오빠. 우리 어떤 사이야? "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막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를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나는 그를 불렀다. "오빠." 단호한 나의 부름에 E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말을 하고 있었다.

"오빠. 음.. 오빠,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오빠는 왜 나한테 사귀자고 안 해?"



이 말을 하는 동시에 나는 후회했다. '아.. 이건 사귀자는 말도 아니고.. 그냥 빨리 그 말을 해달라는 말 밖에 안되잖아..' 키는 작아도 누구보다 자존심은 높은 나한테 결코 용납되지 않는 한 문장이었다. 금세 E의 눈빛은 진지해졌고,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솔직하게 그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음.. 사실 나는 지금 연애를 시작하면서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너도 알겠지만 현재 내 나이와 상황이 그렇잖아. 너 정말 매력 있어. 지금 나 너한테 좋은 감정 있고, 너 만나고 싶어. 그런데.. 결혼을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너랑 시간을 더 보내보고 확실히 말하려고 했었어. 나한테 시간을 조금 더 주면 안 될까?"


그는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그 말은 듣는 내게 잔인했지만 또 한편으로 나는 그의 그런 마음이 너무도 쉽게 이해가 갔다. 그는 나와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연상이었고, 이미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는 나보다 더 현실적이었기에 이성을 만날 때 '직업'은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 비치는 나는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그다음은 세계여행을 갈 거라는 무모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어린 여자이자, 현실보다는 낭만을 외치며 '작가'의 꿈을 꾸며 불안정한 직업을 준비하는 한 여자였을 것이다. 모순적이지만 이러한 나의 계획과 꿈은 한때 예술가를 꿈꿨던 그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이미 두 동강 난 멘탈에 겨우 풀칠을 하고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아니. 이건 아닌 것 같아. 오빠가 지금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계속 오빠는 나를 만나면서도 '결혼'에 대해 고민하고 흔들릴 것 같아. 그리고 지금 이렇게 오랫동안 고민한다는 건 나에 대한 마음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는 것처럼 느껴져. 난 앞으로는 이렇게 못 만나겠어. 우리 이제 연락하지 말자."


그는 나의 단호함에 놀랐다. 곧바로 내게 다시 어떤 말을 하려고 입을 뗐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이제 나가자."

멀찌감치 거리를 유지한 채 그는 나의 집까지 함께 걸어갔다. 어떤 한파의 날씨보다도 우리 둘의 공기는 차가웠고 또 무거웠다. 집 앞에 다 다를 때까지 그는 내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잘살아."

쫓기듯 빠른 걸음으로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곧이어 나는 그와의 메시지를 모두 삭제했고, 바로 그를 차단했다. 이게 그와 나, 단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추억일지라도 그 속의 빛과 색은 결국 희미해진다. 덧붙여 그때의 감정도. <사진은 2014. 12. 태국 빠이>



그 후, 2년이 지나고 나서 E를 포함한 여행 당시 다 함께 친했던 동행들과 한번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 만남을 계기로 1~2년에 한두 번씩 새 글이 올라오는 동행들의 단톡 방에서 E와 나는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고 아주 가끔씩은 개인 카톡을 하기도 했다. 나와 이런 찝찝한 관계인 E가 며칠 전 뜬금없이 내 계정을 팔로우했던 것이다. 그의 팔로우 알림이 울린 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E는 내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안부 인사를 전하며 내게 한번 만나자고 했다.


물론 E가 내게 한 번 보자고 했던 것은 '친구'로서 편하게 만나자는 얘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그와의 약속을 잡지 못했다. 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고, 그에 대한 감정이 말끔히 사라진 지 오래됐지만 나는 E를 볼 자신이 더욱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5년 전 했던 말 "결혼을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라는 말 때문이다. 그 말이 내게 상처가 됐었기에? 아직도 아파서? 아니다. 오히려 그 한 문장을 들었을 당시 이십 대 중반이던 나는 그 말의 무게를 잘 느끼지 못했다. 그 말을 하던 그의 마음을 70% 정도 이해했었다. 나머지 30%는 '왜 만나보지도 않고 벌써부터 결혼을 걱정하는 거지? 내가 진짜 좋다면 만나보고 나서 결혼을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난 5년 사이에 나는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아닌 그 말을 한 사람이 되었었다. 그것도 사랑했던 누군가에게. 그러고 나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 말은 듣는 사람도 아프고 힘들지만 하는 사람도 그와 못지않게 길고 긴 밤 동안 아팠었다는 것을. 만약 이번에 편한 분위기 속에서 E를 만난다 해도 나는 자꾸만 생각날 것 같다.


"결혼을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라는 말을 듣던 나보다 그 말을 해야 했던 내가, 그때 '결혼'을 핑계 삼아 '사랑'을 포기했던 내가, 그리고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아픈 내가, 너무도 선명히 떠오를까 봐.

그게 가장 두렵다.






삼십대라는 수식어가 서서히 익숙해져 가는 나에게 '사랑', '연애' 그리고 '결혼'이라는 단어는 쌓여가는 세월에 비례해 점점 무겁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자꾸만 그것들을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나도 나의 인연을 만나게 되면 '사랑', '연애', 그리고 '결혼'이 두렵지 않게 될까?

더 이상 '결혼'이 피하고 싶은 장애물 같은 존재가 아닌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목적지 같은 존재로 바뀔까?

이 모든 것에 대해 내게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까?

과연 나에게도 그런 사랑이, 그런 사람이 올까..?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의심보다 큰 믿음이 있다. 언젠가 저기 위에 물음표들이 모두 느낌표로 바뀌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사랑을 두려워하지만 포기하거나 도망가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고, 기다린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공감과 댓글은 글 쓰는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