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이 찾아온 불행, 시련이라는 이름 앞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
고등학교 3학년 겨울, 수능을 폭삭 망치고 나서 깊은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런 나를 옆에서 지켜보던 아빠가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었다.
"슬기야. 지금은 수능 성적에 따라서 유명한 대학교에 가는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로 나뉘어 보이지? 아빠도 그랬었어. 그런데 살아보니까 스무 살이 지나고 나서 한 해, 한 해가 지나가고 20대 중반이 되고, 30대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주변 친구들이 사는 모습은 셀 수 없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게 될 거야. 모두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거고, 그때가 되면 너도 네가 지금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거야."
그때 아빠께서 이런 말을 해준 이유는 대학이 인생에서 엄청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주시려고 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던 당시 19살의 나는 수능 때문에 받았던 상실감이 너무 컸기에 그렇게 와 닿지도 위로가 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30년 조금 넘는 인생을 살아온 지금은 아빠가 10여 년 전에 해주셨던 그 말씀에 너무도 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특히 주변 친구들, 그리고 나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그 말이 정말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가까운 지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고향 친구들, 대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동생, 해외여행과 해외 살이 중 친해진 사람들이다. 이들의 주변인으로서 길게는 20년을, 짧게는 3년 동안 함께 한 세월을 뒤돌아보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과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새삼 생경하게 느껴진다.
지나온 우리들의 세월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해왔고, 그 선택을 책임지며 살아왔다. 물론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자신이 한 선택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결과를 맞이해야 했던 적은 꽤 많았다. 가끔은 그 결과가 혼자서는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의 크기와 무게였던 적도 있었다. 흔히 말하는 '슬럼프', '번아웃' 정도의 힘듦 뿐만 아니라 인생의 큰 '위기'라고 불릴만한 사건들이 최근까지 찾아오기도 했었다.
우리 모두는 다 다른 삶의 시작을 가지고 태어났고,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선택 또한 각자 다른 선택을 해왔기에 각자에게 찾아온 위기와 시련의 모습 또한 달랐다. 그렇기에 그 위기와 시련을 겪고, 이겨내는 방법도 달랐다.
누군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동굴 속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기도 했었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방황하기도 했었고, 누군가는 생각보다 빨리 툴툴 털고 일어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도 했었고, 누군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시련을 애써 외면하고 재빨리 그곳으로부터 도망간 후 새로운 선택을 하기도 했었고, 누군가는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결국 비슷한 선택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와 내 주변인들은 꽤나 닮은 구석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불행, 위기'라고 불리는 사건들이 찾아왔을지라도 그것들을 '기회'로 재해석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힘든 사건과 일들이 막상 코 앞에 닥치게 되고, 맨 몸으로 그것들을 견뎌내는 도중에는 모두 다 포기하고 싶기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라도 불행과 위기가 가리키는 두 가지 방향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보통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불쑥불쑥 찾아오는 모든 위기는 두 가지 방향을 가지고 나타난다고 한다. 첫 번째는 그 위기 때문에 앞으로 더 잘못될 방향, 두 번째는 그 위기 때문에 앞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 위기 속에 있다 보면 그 두 가지 방향 중 첫 번째 길만이 더 먼저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다시 힘들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쌓인 선택들이 있기에 그제야 우리는 그 위기, 불행 속에는 또 다른 방향이 있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어느 인문학 강의에서 들었던 한 마디를 잊지 못한다.
'행복한 삶을 결정짓는 것은 위기를 재해석하는 철학적 재능에 달려있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적 재능이라는 그럴싸한 말은 결국 우리가 인생 속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불행과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알아보고 움직이는 그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능력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능력이 아닐까. 내가 스스로 의식하고 고개를 돌려서 보고 싶은 곳을 보는 만큼,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만큼 그만큼씩 이 재능은 생겨나기에.
앞으로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뜻과는 달리 불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위기라는 이름을 가진 일들이 예고 없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닐까.
"모든 일은 그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일어난다는 것,
그러니 그 일이 우리에게 가리키는 방향은 그 일로 인해 '도약할, 성장할 방향'이라는 것을."
저에게 찾아왔던 불행과 위기가 저를 도약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줬던 것은 '글쓰기'였고, 그중에도 가장 큰 힘이 됐던 건 제 이야기를 '공감해주셨던 독자분들'이었습니다.
그 마음 잊지 않고 누군가의 불행, 시련, 위기를 함께 공감하고,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진심이 있는 이야기를 쓰고 나누겠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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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이번 주 목요일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휴재될 예정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좋은 이야기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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