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여행의 목적지는 몰라도 목적은 알아요.
"제주도 도착! 와.. 제주도 오니까 확실히 좋다. 여행 온 것 같아!"
한 달 전, 제주 공항에 이제 막 도착했다는 친한 친구 T로부터 받은 메시지였다. T는 갑자기 내게 '급'으로 제주도 여행을 혼자 갈 건데 월 - 화요일 중에 시간이 가능하냐고 물어왔다. 가능하다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면서. T와는 코로나 19가 생기기 전에 한 번 보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못 봤으니까 거의 2년 만에 만남이었다. 하지만 요즘 다른 곳에서 글을 의뢰받아 쓰는 작업도 하고 있는 상황이라 시간을 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약 이번에 못 보면 왠지 이 약속이 1~2년은 거뜬히 미뤄지게 될 것 같아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약속을 잡았다.
T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나는 T에게 물었다.
"너 근데 이번에 렌트한 거야? 렌트 값 엄청 올랐다고 하던데.. 얼마 주고 한 거야?"
나는 T가 당연히 차를 렌트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T는 조금은 의외였던 교통수단을 타고 온다고 말했다.
"나 이번에는 차 렌트 안 했어. 이번 여행에는 안 해봤던 거 해보고 싶어서. 스쿠터 빌렸어! 스쿠터 타고 제주도 한 바퀴 돌면서 여행해보게!"
나도 이전에 스쿠터를 타고 제주도 여행을 하고 싶다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바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내 주변에서는 T가 첫 번째였다. 뭔가 색달라 보이는 T의 도전에 나는 덩달아 설렜다. 그리고 T는 우리가 만나기 전까지 틈틈이 자신이 스쿠터를 타면서 중간중간 보이는 제주의 풍경을 내게 사진으로 보내줬다. 동시에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내게 했던 "제주도 진짜 좋다.."라는 말은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거진 2년 만에 T를 제주도에서 만났다. 2년 만에 보는 T의 모습은 '흥분, 설렘, 반가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T는 무척이나 더워 보였고, 힘들어 보였고, 또 더워 보였다. 하필이면 최고기온이 29도까지 올라갔던 날씨에, 게다가 구름 한 점 없던 땡볕 아래를 50cc 스쿠터를 타고 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에어컨 바람을 10분 안에 쐬지 않으면 픽하고 쓰러질 것 같은 T를 데리고 바로 옆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T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카페에 앉아 망고맛 아이스 음료를 몇 입 마신 후에야 한 숨을 돌린 듯했다. 의자 한쪽에는 T의 머리보다 훨씬 큰 헬멧과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 손은 어디에서 넘어진 건지 밴드가 길게 붙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픽하고 쓰러질 것 같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자세히 보니 T의 하얀 피부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T가 나를 보자마자 한 말은 이 한 마디였다.
"근데.. 이거.. 좀 아닌 같아.."
여기서 말하는 '이거'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스쿠터'여행을 말하는 것이었다. 육지의 6월 말 날씨도 덥지만 제주도의 6월 말 날씨는 '초'여름이 아닌 '그냥' 여름 날씨라고 생각하면 된다. T는 예상보다 너무 더웠고, 요즘 제주도로 관광객이 더 몰리는 바람에 도로에는 온통 렌터카들 뿐이라 운전하기가 더욱 어려웠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어제 잔 숙소의 컨디션마저 완전 꽝이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줬다.
그런 T의 고생담을 듣는 내내 나는 "어떻게.. 정말 힘들겠다.."라는 말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조금 변태 같지만 내 눈앞에 T의 그 고생이 부러웠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워낙 T도 고생을 즐겨서 하는 같은 부류의 변태과라서 포장 없이 내 진심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그래도 나는 너 좋아 보이는데? 알잖아. 짜증 나는데 동시에 약간 좋은 거? 지금 딱 너 그 상태 아니야? 짜증 나는데 여행 온 것 같고.. 왠지 나중에 엄청 이때를 그리워할 것 같고.. 그렇잖아. 근데 확실한 건 여행은 힘든 만큼 기억에 남는 것 같아."
역시나 T는 나의 이야기에 0.1초의 고민 없이 바로 "맞아! 맞아!!"라고 맞장구를 쳤다.
평소에도 T와는 1년에 한두 번 보면 많이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지만 그럼에도 만날 때마다 누구보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친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번 만나는 그 자리와 그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게다가 이번에는 2년 만에 만났는데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단 2시간 남짓하다니.. 하나 더하면 여기는 항상 우리가 만나던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가 아니라 제주도 서귀포시인데 말이다.
그래도 2시간 동안 꽉꽉 채워서 그동안 서로 살아온 이야기들을 듣고 말했다. 이번에 T가 계획에 없던 제주도 여행을 온 이유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듣게 됐다. 그동안 T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그와 관련된 시험 준비를 열심히 했던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험이 어렵기로 유명하고 경쟁률이 높은 분야라서 결과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T는 계속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에 지원을 했고, 그중에 한 곳에서 좋은 결과를 받아 다음 달부터 바로 첫 출근을 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하는 T의 표정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했다. 그런 T에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다. '원래 준비하던 그 시험에 미련이 남은 건 아닌지'에 대해서. 그러자 T는 조금 전 덤덤함에 한 스푼을 더 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 성격 잘 알잖아. 스스로 만족 잘 못하는 거.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후회 없어. 그 정도로 나 열심히 했어. 그래서 아예 생각이 안 나.
그리고 다음 달부터 새롭게 일하는 곳도 많이 기대가 되진 않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새로운 일이니까 도전이기도 하고. 거기서 의외로 내 적성을 찾을 수도 있고."
T에게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다행이다..'라는 생각보다 '잘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T가 원하던 시험에 붙은 게 가장 잘된 일이긴 하지만 만약 시험에 떨어진 결과를 가정으로 했을 때는 지금 T의 마음가짐과 상황이 가장 베스트라고 생각이 됐기 때문이다.
일단 자기 자신이 미련, 후회가 남지 않을 정도로 시험을 준비할 당시 그 순간에 몰입했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 막 새롭게 시작하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기보다 '새로운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이 T에게 잘 된 일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T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새로 일하는 곳 괜찮을 것 같은데? 이제까지 네가 해보지 않은 일이라서 오히려 더 좋은 것 같아. 너 워낙 새로운 곳 가서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잖아. 직장 다니는 지역도 네가 아예 살아보지 않은 곳이고, 그러면 거기서 새로운 사람들 만날 거고. 이건 너한테 차선책이라기보다 도전이네!"
덧붙여 요즘 내가 생각하는 '도전'에 의미에 대해 T에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나도 예전에는 '도전'이라고 하면 무조건 '내가 원하는 일을 해낸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 그래서 도전을 하고 '실패'를 한다는 게 너무 슬펐던 것 같아. 내가 원하는 일을 해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근 10년 동안 작든 크든 도전하고, 깨지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까 알겠더라고.
도전이란 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이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었는지, 이룰 수 있는 것이었는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과정인 것 같아. 그러니까 소위 말해 도전에 실패했다는 건 그냥 단순히 '실패'한 게 아니라 내가 그 일을 그만큼 절실하게 원하지 않았다거나, 그 일과 나는 맞지 않다는 걸 알게 해 준 거야. 그리고 그 실패로 인해 또 다른 도전을 하게 되잖아? 그러면 그 도전은 결국 또 다른 도전을 불러일으킨 거지. 계속해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아. 도전이란 게 결국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고, 이룰 수 있는 일들을 찾아주는 과정 같아. 너나 나나 그 과정을 누구보다 열심히 즐기고 있는 거고."
누구보다 생각하는 회로가 나와 비슷한 T는 내 이야기를 쭉 듣고는 감탄 반, 장난기 반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와... 진짜... 역시.. 내가 생각하던 걸 또 이렇게 풀어서 말해주네?! 요즘 이 주제로 책 쓰고 있는 거 아니지?
음음.. (목을 가다듬고) '내가 생각하는 도전이란..' 이런 거"
T와 제대로 된 대화를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데 어느덧 시간은 헤어질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T가 스쿠터를 주차한 곳까지 걸어가며 T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제주도에서 사는 거 이번에 들어보니까 정말 힘들어 보이더라. 근데 너는 항상 힘들다고 안 하잖아. 내가 늘 말하잖아.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된다고.
근데 너도 알지. 지금 제주도의 너를 나중에 얼마나 그리워할지를. 너 나중에 막상 여기 생활 끝나면 울 수도 있어. 아까 우리가 말했잖아. 힘든 만큼 기억에 남을 거라고.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그런 거 생각하면서 너무 힘들지만은 않게, 이 생활을 좋아하고 즐기면서 지냈으면 좋겠다."
T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금 전에 내가 T에게 한 말이 곧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맞다. T도, 나도 지금은 살이 익어가는 땡볕 아래서 50cc 스쿠터로 느릿느릿 어딘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를지라도 그럼에도 T도, 나도 우리 둘은 이 여행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여정 자체가 주는 고됨이 나중에는 얼마나 크고 진한 가치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 또한 알고 있다.
그저 바라는 것이 있다면 T가 말한 대로 우리 둘 다 너무 힘들지만은 않게, 너무 지치지만은 않게 이 여정을 즐기고, 나중에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어렵지 않게 이 시간들을 미화시킬 수 있는 추억이 되길 바란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이야기 속에서 때로는 여러분 자신을 만나고,
알아차리지 못했던, 잊고 있던 자신이 지닌 소중함과 그 가치를 마주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