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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Oct 23. 2021

제주 떠나는 날

제주에게, 제주에 있는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

제주 기록, 2021년 3월 3일 수요일


3월 3일 오전 6시 50분, 어제 세팅해놓은 알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어요.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에 비해 1간 30분이나 이른 시간이죠. 요 며칠간 제주도는 흐리고 비가 와서 그런지 아침저녁의 체감온도는 꽤 낮아요. 눈은 겨우겨우 떴는데 전기장판의 온기를 머금고 있는 이불속을 나가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네요. 시계를 멍하니 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벌써 7시가 살짝 넘었어요. 


용기를 내어 이불 밖으로 나왔어요. 오들오들 떨면서 후다닥 씻은 후, 평소보다 빠르게 화장을 마쳤어요. 오늘은 머리도 손질하지 않고 긴 머리카락을 뱅뱅 돌려서 똥머리로 단단히 묶었어요. 그리고 어제 정리하다 만 큰 캐리어를 다시 펼쳤어요. 언제 이렇게 짐이 늘어난 건지.. 분명 제주도에 처음 올 때는 큰 캐리어 하나에 백팩 하나만 들고 왔지만 이제는 여기에 큰 박스 하나가 추가로 더 필요해졌어요. 


그래도 제가 나름 떠돌이 생활계의 고수까지는 아니도 중수 정도는 되잖아요? 캐리어나 배낭의 공간 200% 활용하면서 짐 싸는 데는 어느 정도 도가 텄어요. 방에 널브러져 있던 크고 작은 짐들을 차곡차곡 그리고 꾸역꾸역 넣고 캐리어를 접고, 그 위에 올라앉아 틈을 메운 후 겨우 캐리어 문을 잠갔어요. 후. 여행하면서 늘어난 건 짐 싸는 기술밖에 없는 것 같아요. 


카카오 택시가 이렇게 안 잡히는 건 또 처음이네요. 처음으로 스마트 호출 카카오 택시를 부르니 그래도 한참 뒤에 한 택시가 잡혔어요. 5분 정도 지나 제 호출을 유일하게 승낙해주신 너무도 고마운 택시 기사님이 도착하셨어요.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뒷좌석 문을 열고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드렸어요. 카카오 택시 어플에 떴던 기사님 사진보다 더 나이가 지긋해 보였어요. 기사님은 무뚝뚝하게 "네~"라고 대답해주셨어요.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기사님께서 대뜸 "네비 따라서 왔는데 다른 건물 앞으로 안내해줘서 살짝 늦었어요.."라며 미안하신 듯 말씀하셨어요. 저는 '괜찮다고, 여기 원래 네비가 가끔 이상하게 찍히는 것 같다고, 여기까지 와주신 게 어디냐며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기사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까부터 계속 콜이 뜨는데 아무도 승낙을 안 하더라고요. 왠지 급해 보이길래 멀리 있었는데도 '일단 내가 가야겠다' 싶어서 콜을 받았어요. 아, 아저씨는 원래 서울에서 택시를 오래 했던 사람이에요. 서울에서는 이렇게 멀리 있는 승객의 호출을 받고 출발하면 자주 취소를 해요. 그런데 제주도는 서로 멀리 있는 걸 알아서 그런지 취소를 잘 안 하더라고요..?!"


무뚝뚝했던 첫인상과는 반대로 기사님은 다정하고 친절하셨어요. 그리고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택시를 몇 번 타지는 않았지만 서울에서 오신 기사님을 처음 봬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반갑고 신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기사님께 "맞아요.. 아, 기사님 저도 사실 경기도 사람이에요~ 서울도 오래 살았었고요. 지금 저는 잠깐 제주도에 내려왔는데 어쩌다 보니 3개월 넘게 살았어요. 이번에도 육지에 일 때문에 잠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 것 같아요. 와 여기서 서울 기사님을 다 만나고. 엄청 반갑네요!"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기사님도 이런 제가 반가우셨는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해주셨어요.

"오. 그래요? 아저씨도 예전에 서울 살 때부터 제주도를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틈날 때마다 제주도에 와서 한 달 살고 다시 올라가고, 두 달 살고 다시 올라가고. 그렇게 반복하다가 아예 짐 싸서 이렇게 제주도에 내려와서 살고 있어요."


왠지 말이 잘 통할 것 같은 기사님과 더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터미널이 차를 타면 꽤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벌써 도착한 거 있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저는 기사님께 "감사합니다~ 기사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드렸어요. 그러자 기사님은 고개를 돌려 저와 눈을 마주치고 웃으시면서 인사해주셨어요.

"네. 고마워요. 조심히 잘 다녀와요."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빼고 서둘러 터미널로 가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탔어요. 공항에는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제야 제 두 눈에 오랜만에 맑게 갠 서귀포의 파란 하늘이 보였어요. 그리고 버스가 달리는 중간중간 나무들 사이로 서귀포의 푸른 바다도 보였고요. 이 아름다운 순간을 놓질 수 없어서 저는 휴대폰을 꺼내 연거푸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고 보니 조금은 시끄럽지만 경쾌한 '찰칵찰칵' 이 소리가 참 오랜만이네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에 오늘이 정말로 제주도를 완전히 떠나는 날이라면,

지금 보는 이 모든 풍경이 마지막이라면 내 기분은 어떨까?' 


첫 번째로 든 생각은 '다행이다.' 였어요. 왜냐면 실제로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니까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솔직히 제주를 생각보다 빨리 떠나도 괜찮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었어요. 여전히 제주라는 곳은 좋지만 아무런 연고 없는, 특별한 능력 없는 저 같은 초보 프리랜서가 먹고살기 만만한 곳은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이렇게 제주를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멀어지는 익숙한 장면들을 바라만 보고 있으니 제 마음이 보였어요. 벌써부터 이렇게 온갖 걱정을 하는 걸 보니 제주도에, 특히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세 글자가 되어버린 '서귀포'라는 곳에, 정이 들어버린 제 마음이요.  


그리고 자꾸만 들렸어요. 오늘 만났던 택시 기사님께서 헤어질 때 해주셨던 말씀이요. 

"네. 고마워요. 조심히 잘 다녀와요." 


저와 비슷하게 제주도를 너무 좋아하고, 비슷한 경험을 하셨던 서울분이 해주셨던 말씀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 기사님의 마음과 말투가 너무도 다정하고 친절했기 때문일까요. 

그냥 저 한 마디가 꼭 제주도가 저한테 다정하게 인사해주는 것 같았어요.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제주도에게, 제주도에 있는 누군가에게 '잘 가요'가 아닌 '잘 다녀와요'라는 다정하고 따뜻한 인사 한 마디를 듣고 싶었나 봐요.


그래야 제가 제주에 다시 돌아갈 이유가 생기니까요.

그래야 제가 제주를 좋아하는 그 마음을 애써 감추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래야 제가 제주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니까요. 

"네. 고마워요. 조심히 잘 다녀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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