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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Oct 23. 2021

더 이상 특별하지 않는 제주 일상이 지겹지 않은 이유

어쩌면 지겨움은 착각일지도 몰라.

제주 기록, 2021년 3월 23일 화요일


3월 22일, 어제는 내게 의미 있는 기념일이었다. 

슬기 드림 3월 호(자체적으로 연재하고 있는 메일 구독 서비스)를 시작한 날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제주에 내려온 지 딱! 4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제주가 무슨 남자 친구도 아니고 100일, 200일, 1년 이런 기념일을 챙겨야 하는 상대는 아니지만 새삼 제주를 처음 온 11월 22일이 생각나면서 그동안 이곳에서 지낸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인지는 몰라도 괜스레 의미 부여를 하고 싶었다.


4개월이라는 시간이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은 결코 아닌가 보다. 이제는 지금 지내는 이곳에서 익숙한 장면, 장소, 사람, 감정들이 일상 속에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익숙하다는 것이 절대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요즘 부쩍 혼자 자주 하는 말이 하나 있다. 매일 카페로 출근하는 길, 파란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길가에 무심하게 피어난 유채꽃을 한번 슥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아.. 떠나고 싶다.. 여행하고 싶다." 


원래부터 여행과 같은 일상을 기대하고, 계획하고 내려온 제주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렇게 '글'이 전부인 일상을 보내려고 온 곳이었다. 처음 제주에 내려온 작년 11월만 하더라도 매일같이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도 눈에 보이는 장면들이 낯설어서 그런지 지겹다는 생각이 한 번도 들지 않았었다. 사실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제주에 내려오고 3개월까지도 일상인 듯 여행인 듯한 익숙함과 낯섦이 비등비등하게 내 마음속에는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난 세계 여행 때도 좋아했던 나라나 한 도시에 머물렀던 기간을 돌아보면 대부분 3개월을 넘기지 않았었다. 그때는 특히 시간과 자금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한 곳에서 2개월, 3개월을 머문다는 것 자체도 엄청나게 긴 기간처럼 여겨졌다. 당시에 같이 세계 여행을 했던 주변에 친구들은 내게 "진짜 너 한 곳에 오래 머문다.. 안 지겨워?"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때 나는 거의 똑같은 하루하루를 지냈지만 지겹다거나 지루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2개월 하고 2주라는 시간을 머물렀던 태국의 치앙마이, 3개월을 꽉 채워서 머물렀던 네팔의 포카라. 그 도시들을 떠날 때 '재미없다'라는 감정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던 상황 때문에 떠났었다. 미리 받아놓은 다음 나라의 비자 기간 때문이라던가 금전적인 문제로 바로 돈을 벌러 워킹 홀리데이를 갔다거나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머물렀을지라도 떠날 때 나는 누구보다 아쉬워했고 미련이 가득했었다. 아니 일부러 미련을 그 장소와 내 마음에 덕지덕지 묻히고 남겼었다. 그러면 그 미련 때문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생각해봤다. 지난 여행 때와 달리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좋아하고 있는 제주도에 있으면서도 왜 벌써부터 또 다른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하는 건지 그 마음이 궁금해졌다. 가장 큰 차이점은 지난 여행은 단순히 '여행을 위한 여행'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지내는 제주라는 곳은 여행이라기보다 '생활'과 '생존'에 가깝다. 어떤 곳이든 머물면서 경제생활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따라 그 생활 속 전반적인 정신과 신체의 상황을 좌지우지한다. 그렇다면 이 점을 빼고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결국은 단 하나였다. 세계 여행 중에 좋아하던 도시에 오랜 시간 머무는 동안 내내, 그리고 떠나면서도 '지금' 마주하는 매 순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의 존재를 상상조차 하지 못할 때였지만 그래도 한국과 물리적인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곳으로 다시 올 확률이 낮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소비되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러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은 자연스럽게 더욱 많아지기에.


현실적으로 제주라는 장소는 세계 여행 때 좋아했던 나라나 도시보다 다시 찾아올 확률은 높다. 그리고 쉽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혼자 제주도를 오는데 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역설적이지만 코로나 19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혼자 제주를 찾은 시간은 7년 그 이상으로 걸렸을 것이다. 아니, 혼자 제주도를 온 것이 2013년이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확률의 차이는 확실히 있겠지만 앞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몇 년이 걸린 후에, 몇십 년이 걸린 후에 다시 같은 장소를 돌아간다고 해도 그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쉼 없이 꾸준히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함께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 또한 계속 변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매일 같은 장소에서 눈을 뜨고,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같은 건물에서 일을 하고, 같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같은 곳에서 잠을 자는 우리는 너무도 이 사실을 쉽게 잊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나 또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한때는 마음속 깊이 간절히 꿈꿨던 '제주'라는 곳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고, 또 지금 여기에서 보내는 이 시간들이 나중에 아무리 돌아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순간들임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망각의 동물인 인간 중 한 사람이라 내일 아침 눈을 떠서 예상했던 하루와 비슷한 하루를 맞이하며 또다시 '떠나고 싶다'라는 배부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벌써 벚꽃이 만개해서 분홍 꽃잎이 흐드러진 제주의 길거리를 거닐며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지금, 여기'에서 매일매일 마주하는 장면과 사람과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고.


그러니 

2021년 제주의 봄,

2021년 3월의 제주,

2021년 3월 23일 어제와 비슷하지만 똑같을 수 없는 오늘 하루,

그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나',

이 모든 것들을 언젠가, 언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지 말자고 마음속에 진하게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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