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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Oct 23. 2021

한라산이 등린이에게 알려준 것

의미부여 쟁이가 등산을 하고 깨달은 것

제주 기록, 2021년 3월 24일 수요일


슬기 드림 2월 호(자체적으로 연재 중인 메일 구독 서비스)를 마친 지난주였다. 서귀포 어느 곳에서든 하늘이 맑은 날 고개를 들어 올리면 멀리서 보이던 한라산을, 말로는 적어도 5년 전부터 '가야지 가야지'했던 그 한라산을 드디어 다녀왔다. 사실 나 혼자였다면 이번 연도 안에 한라산은 여전히 내 입에서만 열심히 오르락내리락했을 것이다. 지난주에 제주에 잠시 함께 내려와 있는 친오빠가 곧 제주를 떠나는데 그전에 같이 한라산을 가자는 제안을 해왔고, 나는 별생각 없이 승낙했다.


'산 VS 바다'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바다!"를 외친다. 하지만 이 와중에 웃긴 건 가장 세계 여행 중 좋아했던 도시는 모두 굵은 산줄기가 있던 치앙마이, 포카라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등산을 좋아하지 않지만 20대 초중반에는 어쩔 수 없이 매년 산을 탔었다. 역사학과였던 대학시절, 우리 과는 매 학기마다 4박 5일 동안 정기 답사를 갔었다. 그때 꼭 하루는 통째로 그 지역에서 가파르기로 유명한 산을 등산해야 했다. (그게 몇십 년 동안 우리 과에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한다.)


그때 운동은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나이 체력과 또 쓸데없는 경쟁심과 오기 때문에 심장이 터질 듯 차오르는 숨을 달래 가며 기어코 여자 중에는 세 손가락 안에 들게 정상에 도착했다. 그리고 세계 여행 때 찾은 네팔에서는 14박 15일간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라운딩 등반까지 했다. 누군가는 '히말라야 등산'이 인생의 버킷리스트라고 하지만 그때도 나는 별생각 없이 올라갔다. 그때 만나는 사람들마다 지금 등산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등산을 하고 내려오면 기분이 정말 좋다는 그 꼬임에 넘어가서 산을 탔다.


산을 좋아하지도, 산에 대한 기대도 없던 내게 그 14일은 말도 못 하게 힘들었다. 14일 내내 8시간 넘게 산을 오른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기에 체력은 금세 바닥났고, 온몸의 근육에 힘이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히말라야의 높은 고도 때문에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올랐다. 그때 하루하루, 아니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나한테 '지금 히말라야 안 가면 후회할 거야!'라고 말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리며 "아니! 왜 이렇게 힘든데 왜! 오라고 한 거야!"라고 큰 혼잣말을 하며 그들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런 내가 다시 한라산을, 그것도 백록담 정상까지 가는 코스를 얼떨결에 또 갔다 왔다. 초보 등린이(등산 어린이) 기준으로 왕복 9시간이 걸리는 코스라고 한다. 막상 딱 가기 전날이 되자 조금씩 걱정이 됐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고, 만만하게 볼 등산 코스가 아니라는 후기가 줄을 이었다. 제대로 등산이라는 것을 해본 지가 네팔 히말라야가 마지막이니까 어느덧 3년 하고 반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앞자리의 숫자까지 2에서 3으로 바뀌기까지 했기에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라산 등반 당일 정말 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나이 체력이 뒷받침되던 그 푸릇푸릇 한 20대 초반에 등산을 할 때보다도, 전문 포터가 짐을 들어주며 함께 등반했던 히말라야 등반 때보다도 훨씬 수월했다. 함께 출발했던 팀들과는 멀어진 지 오래였고 혼자 거의 쉼 없이 뚜벅뚜벅 올라가기만 했다. 오르막길도, 계단도. 숨은 차긴 했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심장이 터질 것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분명 어려운 코스라고 했고, 주변만 둘려봐도 20대로 보이는 어린 남자들도 '헉헉헉' 소리를 내며 땀을 뻘뻘 흘리며 쉬었다 가고 있었다.

 

보통 백록담까지 올라가는데 4시간 30분을 잡는데, 나는 3시간 10~20분 정도 걸려서 도착했다. 원래 여행을 갈 때마다 중요한 날 날씨 요정이 되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백록담도 완전히 맑고 깨끗하게 볼 수 있었다. 그제야 상쾌한 바람도 느껴졌다. 갑자기 닭살이 돋았다. 매일 TV에서만 보던 장면이 눈앞에  내 두발로 왔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물이 많이 마르긴 했지만 하트 모양이라 더 기억에 남을 2021년 3월의 백록담.





나보다 늦게 도착한 친오빠를 기다려서 같이 정상에서 준비해온 김밥을 먹고, 인증샷도 여러 장 찍었다. 오빠는 요즘 체력이 너무 안 좋아졌다면서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빠는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근데 너는 산 잘 탄다. 왠지 잘 탈 거 같긴 했는데. 그래도 네가 2년 전부터 인가 맨날 운동했잖아. 그 효과가 있나 보다. 확실히 다르네."


맞다. 생각해보니 나는 2019년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걷든 뛰든, 아니면 홈트레이닝을 하든 일주일에 적어도 5번씩은 운동을 꾸준히 해왔다. 사실 체력은 눈에 보이는 수치가 아니라서 내가 얼마나 몸이 좋아졌는지 알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몸매나 체중의 변화는 느끼긴 했지만 체력의 변화는 잘 몰랐었다. 그런데 이번에 한라산을 타면서 확실히 느껴졌다. 2년이란 시간 동안 하기 싫어도 꾸역꾸역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고, 땀을 냈던 그 성과를 우연히 한라산을 타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니 이 풍경들이 더 값지게 느껴졌다. 또 스스로에게 뿌듯했다.  


이어서 오빠는 내게 또 한 마디를 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너는 이런 게 잘 맞아. 등산이라는 게 오랫동안 계속 비슷한 풍경 보면서 그냥 오르기만 하는 거잖아. 끝이 있다고 해도 당장은 가파르고 험한 오르막 길만 올라가잖아. 나는 이런 게 너무 지겹고 싫어. 어쩌면 네가 하려고 하는 일도 등산이랑 비슷하잖아. 근데 내가 보면 너는 이런 거 잘해."  


오빠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내가 그런가?"라고 물어봤다. 왜냐면 지금까지 내가 보기에 나는 매일 반복되는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무척 힘겨워했기 때문이다. 운동이든 글이든 영어공부든 내가 자발적으로 하나의 행동을 오직 나를 위해 반복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늘 나는 스스로에게 지금 이 정도는 부족하다고, 나는 조금 더 열정적으로, 더 길게 해야 한다고 다그치기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 얼떨결에 오빠를 따라 간 한라산 등반을 통해 일종의 중간 점검을 받은 것 같았달까. 게다가 그 중간 점검 점수는 내 예상보다 좋은 점수를 받은 것 같았다. 단순히 '체력이 좋아졌다.'라는 한 줄 보다는 지난 2년 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반복된 나의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이제야 눈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 더, 지금까지 나는 스스로 특별하지 않은, 매일 반복되는 일을 잘 못하고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멋대로 판단했었다. 그런데 나는 특별하지 않은 매일을 반복하면서 특별한 '나'와 '나의 삶'을 만들 수 있고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몰랐다. 왜 많은 사람들이 '산'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지. 왜 그렇게 쉬는 날이면 산을 올라가고 싶어 하는 지를. 하지만 이제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매일 똑같은,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삶을 사는 일상과 꽤 닮아있는 등산을 하고 나면 조금은 삶에 대해, 그 삶을 사는 나에 대해 자신감이 생긴다. 지겹고 지루하고, 동시에 온 몸과 정신력이 흐릿해지는 반복되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올라 정상을 봤을 때 '나는 그래도 결국 끝을 보고야 마는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리막 길을 걸을 때는 온몸으로 느낀다. 심장이 터질 듯이 숨이 헐떡이던, 숨쉬기도 버겁던 오르막 길을 걷는 것은 , 인생에서도 오르막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가 지금 사는 일상이 지겹고 버거운 이유도 결국 인생이라는 등산길에서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이미 가빠진 숨소리와 심장박동 수만큼 인생의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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