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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Oct 23. 2021

저 000랑 200일 됐습니다.

프리랜서 작가의 제주 생존기의 한 페이지

제주 기록, 2021년 6월 14일 월요일


지난주 수요일이었다. 휴대폰에 저장 공간이 부족하다는 알림에 휴대폰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자주 쓰지 않는 어플들을 하나둘씩 지워나가고 있었다. 그때 오랜만에 터치해보는 한 어플이 있었다. 바로 D-day를 계산해주는 어플이었다. 내가 이 어플을 이용하는 주목적은 예전에 장기 여행과 호주 워홀 때 각 도시마다 지낸 기간을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적어놓은 리스트들을 쭉쭉 내리다가 보니 'D+200'이라는 예쁜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숫자 위에 글자를 보자마자 나는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와.. 나 오늘 200일이네!"


맞다. 나랑 지금  시점에 200일이 될만한 ..  하나다.  이런 말은 웃기지만  5 전이 제주도랑 200일인 날이었다. 제주도에 내려온  평소보다는  빡세게,  다양한 일들을 하면서 지내서 그런가. 본가에 있을 때보다 유독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같았다. 하루하루 글을 쓰면서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을 해나가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진행하다 보니 벌써 나는 제주도에서  번째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 온 지 이제 두 달을 넘겼고, 60일이 넘는 시간은 내게 안정적인 루틴을 가져다주고 있다. 생활 루틴은 그 전보다 건강해졌고 조금 더 간결해졌지만 요즘 내 일주일은 꽤 바쁘다. 일단 월, 수, 금요일에는 슬기 드림 연재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고, 그 외에 요일과 시간에는 글쓰기 클래스에 모든 시간과 정성을 쏟고 있다.


글쓰기 클래스에 대한 커리큘럼과 홍보물 제작 등 모든 준비를 끝낸 건 약 3주 전이다. 남은 건 홍보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현실적으로 내가 홍보를 할 수 있는 온라인 공간과 오프라인 공간이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제대로 홍보를 하려면 적지 않은 홍보비가 필요했다. 물론 지금 내가 하는 일도 일종의 사업이기 때문에 초반에 마케팅과 홍보에 있어서 돈을 써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지금 내 금전적인 상황이 워낙에 타이트하다 보니 홍보비 마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리저리 찾아보고 고민한 결과, 제주도는 (특히 내가 지내는 서귀포는 더욱) 아직 오프라인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후에 길거리를 지나갈 때 유심히 보니 유동인구가 많은 전봇대나 버스정류장 같은 곳에 광고 전단지들이 빼곡히 붙어있었고, 이전에도 수없이 전단지들을 붙였던 초록색 테이프 자국들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냥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기보다 '뭐라도 해보자!'라고 다짐했다. 바로 다음 날, 동사무소에 들려 미리 만들어 놓은 홍보용 전단지를 여러 장 인쇄했다. 그리고는 바로 옆 이마트에 들려서 테이프 하나를 샀다.

 

그날따라 부슬부슬 얇은 빗방울이 바람결을 따라 내 피부에 미스트처럼 뿌려졌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나온 거 오늘은 인쇄한 종이만이라도 다 붙이고 주변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 들려서 유료 광고비를 문의하자고 마음먹었다. 20대 때는 내 사업도 아닌 남에 사업 전단지 알바도 그렇게나 부끄럼 없이 열정적으로 했던 나였는데 막상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전단지를 붙이려니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원래 '텅장계좌'의 힘은 가장 강한 법이다. 다음 달이면 정말 텅장이 되어버릴 내 계좌를 생각하며 꿋꿋하게 한 장씩, 한 장씩 전단지를 붙였다.



하루 종일 전단지를 붙이고, 아파트 관리실을 돌아다니면서 광고 가격 알아보고, 너털너털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마주한 붉은 노을.



해가 멀리 갈수록 하늘에서 흩날리던 가벼운 빗줄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편하지 않은 신발을 신고 오래 걸어서 그런가 발바닥이 아파서 잠시 비를 비할 수 있는 도서관 벤치에 앉았다. 그때 유일한 동네 친구 B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B는 이 근처라면서 잠깐 얼굴을 보자면서 내가 있는 쪽으로 오겠다고 했다. 하루 종일 혼자 다니느라 지쳐있었는데 B의 연락이 너무도 반가웠다.

 

B는 나를 보자마자 오늘은 도서관에서 글을 쓴 거냐고 물었다. 나는 몇 장 남은 전단지를 보여주면서 "오늘은 작업 안 했고 이거 이 주변 여기저기 다 붙이고 다녔어."라고 피곤함이 잔뜩 묻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B는 내가 만든 전단지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대박. 이거 그 클래스 전단지야? 이것도 다 네가 만들었겠네? 그리고 직접 다 이거 붙이고 다닌 거야? 이런 날씨에? 와.. 진짜 대단해.. 너는 안 보다가 다시 볼 때마다 그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뭔가 더 새로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아니, 점점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아."


솔직히 말하면 요즘 나는 꽤 답답했다. 여기저기 온 오프라인으로 내 주변 지인들은 물론이고 구독자님들께 "저 제주도에서 글쓰기 클래스 할 거예요!"라고 당당히 말하고 다녔는데 '홍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매일 확인하는 계좌의 가벼운 숫자들은 내 숨통을 더욱 조여오기도 했다.

 

B가 바로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해준 말이 너무도 예상 밖이라 그런지 내게는 그 어떤 말보다도 힘이 됐다. 그리고 B는 내게 "나라면 엄청 소심하게 잘 붙이지도 못하고.. 이렇게 전단지 만들어서 붙일 생각을 애초에 못 할 것 같아. 너는 볼 때마다 가끔은 신기해."라고 덧붙여 말해줬다. B의 따뜻한 말들에 괜스레 쑥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는 말했다.

"어우~ 아냐. 대단하기는. 난 대학생 때 과외도 이렇게 다 혼자 전단지 붙이고 돌리면서 구했었어.. 그냥 이게 다 예전에 해봤던 그런 경험 때문에 힘든 것 같지는 않아. 그나저나 클래스 홍보가 쉽지가 않아서 막막해.."


B는 말했다.

"역시. 다 헛된 경험은 없나 봐..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네가 제주도에서 혼자 이렇게 해나가는 게 대단하기만 해. 그러면 클래스는 아직 문의도 한 명도 없던 거야..?"

나는 지금까지 클래스 문의는 몇 분 있었는데 모두 다 성사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자 B는 내게 오히려 한층 높아지고, 밝아진 목소리와 표정을  이렇게 말했다.

"아 정말? 너 내가 좀 아까 말했지? 너는 가끔 볼 때마다 항상 뭔가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명히 우리 다음에 만날 때는 네가 나한테 클래스 수강생 구해졌다는 이야기 해줄 것 같은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너 진짜 잘하고 있어. 슬기야."   


제주도 온 지 200일, 돌아보면 많은 것을 하기도 했지만 아직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 해야 할 일 중에는 단순히 나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일은 없다. 지금 이렇게 비 오는 날에 전단지를 붙이고 다닌 이유는 실낱같은 희망을 잡기 위해서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나중에 너무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래서 했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이러고 있는 내가 대단하게 보이기보다 약간은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괜히 '제주도'라는 지역에서 이 일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단점들을 자꾸 떠올리고 있던 찰나였다. 그러면 지금 나의 모습이 조금은 덜 작아 보이지 않을까 해서.


B가 해준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사람은 본인이 해왔던 일,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쉬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일일 수도 있고, 또 거꾸로 나에게 어려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할 수 있는 일 일 수도 있다. 그렇다. 이렇게 서로 다른 타인과 살아가는 삶이기에 상처도 받지만 반대로 용기와 힘을 받기도 한다. 꼭 예상하지 못했던 깜짝 선물처럼.




B의 말을 듣고 나서야 요즘 나는 나도 모르게 이 말을 듣기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그리고 네가 하고 있는 일은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정말 너 대단하다고.

그러니 앞으로도 잘할 수 있다고.'   


지금까지 200일 넘게 제주에서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오늘만큼은 따뜻하고 힘찬 박수를 쳐주며,

그리고 다음에 B를 만날 때는 정말 B의 말대로 한 단계 더 발전된, 새로운 소식을 들고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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