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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Oct 23. 2021

제주도에서 동향 사람을 만나면 생기는 일

제주도에서 1년을 더 살기로 한 내 선택이 듣고 싶었던 말.

제주 기록, 2021년 4월 28일 수요일


3주 전이었다. 염색을 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이 동네에서 리뷰가 좋은 한 미용실을 찾아갔다. 생각보다 미용실의 규모도 컸고,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머리를 하고 있는 손님들이 많았다. 친절하지만 어딘가 서툴러 보이는 남자 스텝분이 안내를 해주셨다. 예약을 미리 한 덕분에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스텝분이 아주 느린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주시고는 염색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아직은 어색해 보이는 남자 스텝분의 손길에 조금씩 불안감이 엄습해올 무렵 왼쪽 가슴 위에 ‘원장’이라는 명찰을 달고 계신 여자 직원분이 내 자리로 오셨다. 그러자 남자 스텝분은 새롭게 들어오는 손님을 안내하러 나가셨고, 원장님은 연륜이 느껴지는 빠른 손길로 내 머리카락에 염색약을 바르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동시에 더욱 연륜이 느껴지는 입담을 자랑하시면서 내게 기분 좋은 칭찬을 과하지 않게, 하지만 담백하게 해 주셨다.

 

나도 모르는 사람이랑 워낙 금방 친해지는 성격에, 서비스업에서 몸담았던 기간에 꽤나 길었던지라 이런 분들을 만나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고 대화가 이어진다. 원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나는 제주도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착할 미용실을 찾다가 우연히 이 미용실로 오게 됐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원장님은 너무도 반가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육지 분이시구나! 저도 사실은 계속 육지에서 미용실을 하다가 2년 전에 제주도에 내려와서 이 미용실을 차린 거예요.”  

“아 정말요? 그러면 육지에 계실 때는 어느 지역에서 미용실 하셨었어요?”     

“저는 경기도 일산에서 오래 했었어요~”     

“아 일산이요? 일산이랑 멀긴 하지만 저도 경기도 사람이에요!”     

그러자 원장님께서는 한 톤 더 높아진 목소리로 내게 물으셨다.

“오 경기도 어디요? 저 고향은 경기도 양평이에요!”      

경기도 양평이라는 말에 나는 자동 반사적으로 그보다 더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여주! 여주 사람이에요! 와.. 진짜 신기하네요!”                


제주도에 짧지 않은 시간을 지내면서 유독 육지에서 내려온 사람들, 그중에도 내가 오랜 시간 살았던 경기도나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다. 제주도에 내려와 사는 이유는 모두 제각각 다르겠지만 아무튼 ‘육지에서 내려와서 제주도에 살고 있다’는 공통점 하나 때문인지 그 순간부터 끈끈한 유대감이 마구마구 생겨나기 시작한다.


       




미용실 원장님도 2년 동안 제주도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지역 (양평-여주는 차 타면 30분 거리다.) 사람은 처음 본다면서 무척이나 반가워하셨고 신기해하셨다. 그러면서 제주도에 내려오게 된 이유와 지금 이렇게 자리 잡을 수 있던 과정들을 자세히 말씀해주셨다. 이어서 나 또한 어쩌다가 제주도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1년을 더 지낼 방을 구하고 있던 상황까지 말씀드렸다. 이렇게 원장님과 제주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스크 때문에 원장님의 입 주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코와 입을 제외한 모든 얼굴 표정과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원장님의 입가에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이다.      

염색이 모두 끝날 때 즈음 원장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는 제주도 내려오고 나서 주변 사람들이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제주도에서 자리 잡고 사는 거 텃세나 물가 때문에 만만치 않다고 들었는데 어떻냐고요. 사실 저도 오기 전에는 걱정 많이 했는데 막상 오고 나니까 저는 너무 좋은 거 있죠?! 물론 제주도라서 불편한 것도 있지만 그런 건 어딜 가나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제주도 이제 1년 더 사신다고 했죠? 잘 생각했어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저는 너무 좋아요. 아마 우리 고객님도 살면 살수록 더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앞으로 종종 들리세요. 머리 안 하더라도 커피 한 잔 하면서 이야기 나누고 그래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 마치고 나오는 길, 유독 기분이 좋았다. 원장님이 단순히 타지에서 만난 동향(정확히 동향은 아니지만 ‘여주, 이천, 양평’은 동향급이다.)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해서 한 선택을 만족해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내린 선택을 만족할 수 있게끔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고, 현재도 끊임없이 만들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방을 한참 알아볼 때 내 조건에 맞는 방을 구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었다. 특히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있었다. 안 그래도 지금 나의 현실적인 상황에서 제주에 산다는 것은 꽤나 무모한 도전이었기에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1년은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는데 방을 구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자 나도 모르게 내가 내린 선택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다. 일부러 제주도에서 지내면 생기는 단점들만 더욱 크게 바라보려고 했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내린 선택을 책임지지 않아도 될 그럴듯한 이유, 핑계가 생기는 거니까.

      

그래서 방을 구하는 시기 동안 더욱 힘들었다. 방은 구해지지 않고, 나는 지쳐만가고 스스로에게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 

‘제주도에 산다는 것, 내가 이 선택을 내린 것이 맞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원장님의 이 한 마디가 듣고 싶었고, 또 필요했던 것 같다.     

“제주도 이제 1년 더 사신다고 했죠? 잘 생각했어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저는 너무 좋아요.”        

    



그렇게 좋은 기분과 기운을 느끼고 왔기 때문일까. 그 원장님을 만나고 당일에 전화를 했던 공인중개사를 통해 지금 내가 지내는 이 집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 내게 필요했던 건 좋은 사람에게 느껴지는 좋은 기분과 기운도 있지만, 결국은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한,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었다.            


요즘 들어 내가 혼자 있을 때나, 친구들을 만났을 때나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 정말 제주도에 살길 잘한 것 같아. 너무 좋아.”     

맞다.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한 옳고 그름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저 그 선택을 내린 나만이 그 옳고 그름을 만들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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