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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Oct 23. 2021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무거운 질문들이 파도처럼 나에게만 밀려오는 그런 날.

제주 기록, 2021년 2월 22일 월요일


지난주 토요일, 그러니까 이틀 전이네요. 저에게 토요일은 별다른 일정이 없다면 유일하게 글쓰기에 대한 압박감 없이 쉴 수 있는 날이에요. 그래서 이번 토요일만큼은 휴대폰 알람 없이 늦잠을 자고, 바스락거리는 이불 안에서 뒹굴뒹굴 집콕하면서 여유를 부려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런 저의 달콤한 게으름을 방해한 건 다름 아닌 예고 없이 성큼 다가온 제주의 봄 날씨였어요. 


습관처럼 일찍 눈이 떠져서 창문에 커튼을 열었어요. 잠옷을 입은 채로 멍하니 한참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는 바다를 바라봤어요. 아무래도 나가긴 해야겠더라고요. 주중에도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이 있지만 연재 마감 때문에 제주의 따뜻한 봄 날씨를 온전히 즐길 수 없거든요. 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외출 준비를 시작했어요. 오늘 같은 날은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도 괜히 예쁘게 입고 싶고, 화장도 공들여서 하게 되고, 머리 스타일에도 한껏 힘을 주고 싶어 지잖아요?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외출 준비를 모두 마쳤어요. 가방을 메고, 신발까지 신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정하지 않았더라고요.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나가서 걷는 내내 고민했어요.

'근데 나 어디 가지?'

토요일이고 날씨도 좋아서 그런지 렌터카들이 길거리에 많이 보였어요. 그리고 문득 떠오른 곳이 서귀포 시내였어요. 시내에는 올레 시장이 있어서 여행자들로 늘 북적거리는데요, 그 분위기를 오랜만에 느껴보고 싶어 졌어요.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걸려서 시내에 도착했어요. 역시나 차도 많고,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이제 저도 서귀포에서 3개월을 살아서 그런지 겉모습만 보고도 대충은 '여행자인지 이곳에 사는 사람인지'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의 눈은 생긴 것 같아요. 사실 어느 곳에서든 여행자를 알아보는 건 쉽잖아요. 여행자는 낯선 곳에 도착해 모든 장면을 생경하게 바라보는 그 초롱초롱하면서도 어리바리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시국이 시국인지라 사람 많은 곳에 오래 있기는 부담스러워서 바닷가 쪽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작년 11월, 서귀포에 도착하고 바로 다음날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걸어봤어요. 그때 저도 오늘 제가 본 제주의 여행자들과 똑 닮은 눈빛으로 모든 풍경을 바라보느라 바빴거든요. 혼잣말로 계속 "우와....", "진짜 멋있다..."를 연발하면서요. 그날의 그 기분을 오랜만에 다시 느끼고 싶었어요.


하늘이 진한 주황빛으로 물들 때까지 서귀포항 주변을 내리 걸었어요. 저는 어딜 가든 '노을' 앞에 서면 넋 놓고 바라보는 노을 덕후지만, 확실한 건 3개월 전 서귀포 바닷가를 처음 걸었을 때 그날 그 느낌은 아니었어요. 이제는 이런 풍경을 몇 번 봤다는 기억력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런 풍경은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다는 안일함 때문일까요.


곧이어 제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들이 찾아왔어요.

'나는 제주에 언제까지 있게 될까?'

'나는 제주를 여행하는 여행자 일까? 아니면 제주에 정착하기 위해 온 사람일까?'

'나는 제주에 왜 있는 거지?'


사실 제주에 내려온 후 지금까지 여행자답게 이곳을 즐겨본 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예요. 매일 비슷한 하루하루를 3개월 동안 지내면서 이제는 이곳의 오늘과 내일이 예측 가능해졌어요. 그러면서 제 표정에는 설렘과 호기심, 경계심이 사라진지는 조금 된 것 같아요. 길거리를 걸을 때에도 두 눈에 들어오던 새로움에 자극받아 두리번두리번 거리던 제 고개와 눈동자는 이제 힘없이 한 곳만 응시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저는 지금 '여행자'는 아닌 것 같아요.


단순히 현재 상황만 놓고 보자면 제주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맞지만, 아무튼 저는 이곳을 떠나기는 하지 않을까요. 요즘 들어 가끔씩 육지에서의 일상이 생각날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당장 육지로 돌아가고 싶어서 비행기 표를 알아보는 정도는 아니에요. 그런데도 가끔씩 이렇게 육지가 생각난다는 건 조금씩 그리워지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제주에서 저는 애매한 사람이에요. 여행자도 아니고 여기 정착하려는 사람도 아니니까요.






파도와 같이 떠밀려오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급격히 차가워진 바닷바람이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어요. 차가워진 손발을 움직여 서둘러서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탔어요. 승객이 단 두 명뿐이 없던 텅 빈 버스 안,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요. 뭔가 엄청 허무한 거예요. '난 오늘 뭐 한 거지?' 떠올려보니까 기껏해야 시내 나가서 바닷가를 걸은 것 밖에 없는 거예요. 이러려고 이렇게 열심히 멋을 부렸나 싶기도 하고. 그냥 방에서 푹 쉴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요. 


허무함을 뒤로하고 버스에서 내려서 잠시 마트에 들렀어요. 내일 아침에 먹을만한 음식을 사려고 했는데 늦은 시간 때문인지 딸기가 40%나 세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가장 상태 좋은 딸기들이 담겨있는 박스 하나를 고심해서 골라 담았어요. 그동안 딸기 코너는 바라만 보고 가격 보고 꾹 참고 지나갔었거든요. 이게 뭐라고 참 기분이 또 금세 좋아지는 거 있죠.

  

장을 다 보고 딸기 박스를 품에 안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매일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집으로 갈 때와는 뭔가 달랐어요. 글 쓰다가 지친 정신과 몸을 이끌고 걸어갈 때는 여기가 제주라는 걸 잊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오늘 오랜만에 바라본 서귀포항 바닷가와 노을이 떠오르면서 어쨌거나 '나가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곧이어 서귀포항 바닷가 앞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찾아 헤매던 질문의 답이 떠올랐어요.


맞아요. 저는 제주도를 여행하기 위해 온 여행자도, 제주도에 정착을 하기 위해 온 이주자도 아니에요. 생각해보면 애초에 제가 여기에 온 목적은 '제주도에서 살아보기'였어요. 그러니 이렇게 제주도에 3개월을 살았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으니 저는 목적을 이루고 있던 거였어요.


이 질문과 답은 제주도에서의 삶에만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 그런 날 있잖아요. 

똑같은 일상을 잘 살고 있다가 이따금씩 이런 질문들이 마구마구 내 머리와 가슴속을 헤집어 놓는 날.

'나 왜 사는 거지?'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처음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가 태어날 때 어떤 이유나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온 게 아니잖아요. 삶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라 하면 '삶, 살아가는 것' 그 자체죠. 그러니까 꼭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어떤 것이 되기 이전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이 사실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임무를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우리는 끝없는 욕심이 생겨나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삶이 당연해지고 나면, 자신만의 삶의 목적을 만들죠. 그리고 내가 만들어놓은 그 목적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죠. 그 목적으로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흔들리고 넘어지고 아파요. 그럴 때 우리는 그 목적에 대해 의심하고, 더 깊게 들어가면 삶에 대해 의심을 해요.


그래요. 그것 또한 우리 삶이에요. 그런데 우리 삶이 꼭 그런 목적, 목표로 가는 과정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고 꼭 매일 같이 여행자의 설렘과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일상을 살아갈 수 없죠. 때론 초점 없이, 감정 없이 살아가는 일상도 우리의 삶이죠. 동시에 마트에 갔다가 우연히 세일하는 딸기 한 박스에 행복한 순간도 우리의 삶이고요. 매일 걷던 퇴근길에서 유독 밝고 선명한 달빛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그 순간도 우리의 삶이에요.  


우리 가끔 오래된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맛있는 음식에 소주 한 잔 하면서 한 마디 하죠.

"야.. 인생 별거 있냐. 이렇게 맛있는 거 먹으면서 너네 보니까 너무 행복하다. 이게 인생이지."라고요.


그래요. 산다는 것, 인생은 때론 '별거'이다가도 때론 '별거 아닌 거' 같아요. 그러니 우리 너무 진지해지지 말아요. 굳이 우리의 삶의 목적을 하나로 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예요. 그냥 살면 돼요. 이왕 삶의 목적과 목표를 만들 거면 때에 따라 크고 작은 목적을 만들어봐요. 그 목적에 필요한 조건들은 없어요. 겉보기에 화려해도 되고, 나만 알고 싶은 비밀스러운 목적이어도 돼요. 어차피 나와 당신은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목적인 '삶'을 잘 지켜오고 있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충분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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