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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Oct 23. 2021

우리 모두는 남겨진 사람, 그리고 떠나간 사람

그렇기에 지금 우리의 인연은 더욱 소중해요.

제주 기록, 2021년 1월 27일 수요일 


작년 11월, 제주도에 내려오자마자 제가 한 일은 작업을 할 만한 카페를 찾는 일이었어요. 그때 지내던 숙소 주변에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생각보다 없더라고요. 처음에 디지털 노마드족의 오피스라고 불리는 스타벅스부터 가봤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규모도 크지 않고, 거리두기 때문인지 테이블도 많이 빠져있었어요. 당시 숙소에서 걸어 다니면서 작업할 만한 곳들을 하루, 하루 바꿔가면서 탐색하던 중 드디어 마음에 드는 한 카페를 발견했어요. 


그 카페가 동네에서 제일 괜찮다고 결론짓고 나서부터는 고민 없이 매일매일 그 카페를 갔어요. 밥 챙겨 먹기 귀찮을 때면 그냥 일찌감치 카페로 가서 샌드위치랑 커피를 먹으면서 글을 썼어요. 그리고 중간에 커피 한 잔을 더 시키고요. 정말 제 사무실인 듯 집인 듯 그렇게 지냈어요. 그리고 카페 직원분들이 워낙 친절하셔서 그런지 저를 아예 기억하시고 살뜰히 더 챙겨주시더라고요. 그렇게 매일 출퇴근을 그곳에서 하다 보니 저처럼 작업이나 공부하러 매일 카페로 오는 단골손님들이 제 눈에도 익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카페 직원분들과도 짧은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해졌을 때쯤, 저한테 불쑥 한 남자 직원분이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근데.. 육지 분이시죠?"

"엇? 네??? 네..!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때까지는 제 신상에 대해 이야기한 게 하나도 없어서 저는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매일 한 카페에 오면 대부분 여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거든요.


그리고는 그 직원분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대답하셨어요.

"그냥 딱 보면 알아요. 저는 처음부터 육지 분이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직원분께 육지 사람과 제주도 사람의 그 차이가 뭔지 물어봤어요.

"육지 사람이랑 제주도 사람이랑 뭐가 달라요? 어떤 차이가 있어요? 저는 하나도 모르겠는데.."

"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그 느낌이 딱 있어요. 아! 그러면 매일 비슷한 시간에 2층에서 노트북 하시는 남자분 아세요? 키 크고 아이보리색 패딩 입으신 분!"

"음.. 아! 알아요! 매일 제 대각선 테이블 쪽에 앉으시는 분! 맞죠?"

"네. 그분도 아직은 안 여쭤봤지만 딱 봐도 육지 분 같아요. 그분도 단골손님이니까 제가 한 번 기회 되면 여쭤볼게요." 






그 카페 직원분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지 벌써 한 달하고도 몇 주가 지났네요. 그 사이 저는 중간에 한 번 이사를 했고, 옮긴 동네는 원래 매일 가던 카페와 거리가 꽤 멀어졌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매일 가는 카페가 바뀌었어요. 그래도 이전에 가던 단골 카페가 시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쪽에 나갈 일이 있거나 약속이 있으면 꼭 그 카페에서 작업을 하다가 가요. 일종의 단골손님의 의리랄까요.  


며칠 전, 볼일이 있어서 그 카페를 오랜만에 찾았어요. 역시나 카페 직원분들은 저를 기억하고 엄청 반갑게 인사를 해주셨어요.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을 때였어요. 저와 대화를 종종 나누던 그 남자 직원분이 축 처진 어깨와 사연 있어 보이는 얼굴 표정으로 제 앞자리에 앉으셨어요. 저는 심상치 않은 직원분의 표정을 보고 이렇게 물었어요.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보여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요즘?"

"무슨 일은 아닌데요.. 그 혹시 저번에 오셨을 때 제가 육지 분처럼 보였다는 그 남자 단골손님 기억하세요?"

"아, 네! 그분! 기억하죠."

"그분 오늘 저한테 마지막 인사하고 가셨어요. 원래 서울분이시래요. 기분이 뭔가 이상하네요. 참.. 육지 단골손님들이 이렇게 떠나가고 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서 이렇게 정을 주면 안 되는데.. 어렵네요.." 


짧은 시간이지만 볼 때마다 늘 밝아 보였던 그 직원분의 낯선 모습인 축 처진 어깨와 눈매, 그리고 목소리를 듣는데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 순간 심장이 아릿했어요. 꼭 몇 년 전 여행길 위에서 저를 보는 것 같았어요. 긴 여행 중에 언제가 가장 기억에 남았고, 언제가 가장 힘들었냐고 물어본다면 그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같아요. '내가 마음을 줬던 누군가를 먼저 보내야 했을 때'예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기억과 추억을 쌓은 곳에서, 나는 남아있고 그 사람의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볼 때였어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알기에 여행 때마다 저는 항상 발버둥 쳤어요. 첫 번째는 낯선 사람이 아는 사람이 되는 건 쉬울지라도 그 사람에게 마음을 쉽게 주지 말 것을, 두 번째는 남겨진 사람보다는 떠나는 사람이 되자고요. 그만큼 마음을 준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은 몇 번이 반복되어도 제게는 버거웠으니까요. 

그렇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남겨지지 않으려고 참 애썼어요. 마음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조그마한 틈 사이로 누군가가 들어올 것 같으면 경보기가 울려댔어요. 그리고 그곳을 서둘러 도망쳤어요. 꼭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사람에, 정에, 그런 마음에 휘청거릴 제가 뻔히 보였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어쩔 수 없이 남겨져야 했던 순간들과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야 했던 순간들 모두 수 없이 겪어보고 나서야 그 두 마음을 다 알겠더라고요. 남겨진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라지고도 멍하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는 일, 그리고 이미 떠난 사람과 함께 시간을 나누었던 그곳에 홀로 남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쓰라린 추억을 맞닥뜨리는 일이죠. 


그런데요, 떠나는 사람은 이별의 순간 뒤돌아 볼 수 없어요. 그때 뒤돌면 남겨진 사람의 앞모습이 보이잖아요. 남겨진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게 다 무너질 것 같거든요. 그래서 앞만 보고 가요. 그때 그 발걸음은 꼭 제 심장 위를 걷는 것 같아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심장이 아프다 못해 아려요. 그리고 남겨진 사람과 그 장소가 멀어지면서 모든 게 다 꿈만 같아져요. 다 허상 같아요. 허무해요. 분명 두 눈에 보이지 않고, 두 귀에 들리지도 않는데 자꾸만 보이고, 자꾸만 들려요. 그 사람과 그곳이요.  


맞아요. 남겨진다는 것도, 떠난다는 것도 둘 다 결론적으로는 아플 수밖에 없는 일이죠. 그런데 그 어떤 관계 일지라도, 그 안에서 어떤 감정을 나눴을지라도 떠날 때 서로에게 가슴 아플 정도의 기억을 만들었다는 거 아무 때나 아무랑 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요.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던 사람이었잖아요. 우리도 매일매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다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아무리 카페 직원과 손님 간의 관계 일지라도,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바디랭귀지로만 소통하던 숙소 사장님과 여행자 일지라도, 고작 14일 동안만 함께 여행했던 동행일지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안녕'을 말할 때 먹먹함과 그리움이 먼저 찾아온다는 건 그만큼 서로가 서로이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요. 


그때 카페 직원분을 보니 항상 그랬던 것 같았어요. 정이 많은데, 정을 주고 나면 누군가 떠날까 봐 두려워서 늘 준비하고 미리 연습하는 사람 있잖아요. 바로 저같이. 저 같아서 더 잘 보이더라고요. 그 행동과 그 마음이요. 그래서 그날 그분한테 이 말을 해주진 못 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전해드리고 싶어요.  


"음.. 우리가 만나게 되는 모든 인연들은 둘 중 한 명은 떠나가고, 한 명은 남겨질 수밖에 없잖아요. 저도 예전에는 그렇게 항상 헤어짐을 연습하고, 그리움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막상 떠나고 나면 준비한 거나 준비를 하지 않은 거나 똑같이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오히려 후회되던데요. '내 옆에 있을 때 그 사람과 그 순간에 더 몰입할걸..'이라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찾아오는 소중한 인연들에 겁내지 말아요. 다 이유가 있을 거예요. 인연의 길이가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진하면 진한 대로, 희미하면 희미한 대로. 꼭 지리적으로 멀리 사는 사람이라 떠나가는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만났다가 헤어져야 좋은 인연으로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라 그런 걸 거예요. 이런 인연이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인연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 겁내지 말고, 너무 미리 일찍부터 준비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저처럼 소중한 인연의 기억과 추억을 만들 기회 조차 놓칠 수 있어요. 

이제 우리 앞으로 다가올 남겨짐을, 떠나감을 연습하지 않는 연습을 같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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