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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가 30대가 되면 멋진 삶을 살 줄 알았어

멋있는 삶을 살고 싶은, 하지만 이미 멋있는 삶을 살고 있는 당신에게.

by 기록하는 슬기

1년 6개월 전, 제주에 내려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친구 L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현재 L과 나의 사이는 친하다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친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관계이다. L은 내가 제주도에 내려간 소식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봤다면서 얼마나 지낼 예정이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대뜸 그녀는 다음 달 즈음 나를 볼 겸 바람도 쐴 겸 제주도에 내려오고 싶다고 말했다. 가장 최근에 L과 단둘이 만난 게 최소 5~6년 전인데.. 갑자기 나를 보러 제주도까지 내려온다니 조금 의아했다.


그리고 몇 주 후, 그 당시 코로나 19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되면서 L의 제주도 여행 계획은 무산이 됐다. 그녀는 이번에 못 가게 돼서 너무 아쉽다며 내가 제주에 있는 동안 꼭 나를 보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뒤로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새해 인사를 하며 대화는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L의 마지막 메시지겠거니 하고 본 카톡에는 의외의 문장들이 적혀있었다.


"슬기야. 나 꼭 너 보러 갈 거야! 어느 날 갑자기 너한테 전화해서 나 제주도라고 할 수도 있어.. 솔직히 요즘 나 너무 대화할 상대도 없어.. 알잖아. 친구라고 다 똑같은 친구 아닌 거. 말 안 통하는 사람은 안 만나게 되니까 더 혼자 있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인지 난 요즘 답답하고 우울해."


사실 L의 외로움, 우울함은 이전의 카톡 메시지를 통해서도 어렴풋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나도 L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 같지 않았다. 특히 L이 보낸 이 감정은 30대가 되고 나서 더욱 자주, 더욱 깊게 느끼는 감정이기에 L의 말에 극히 공감했다. L에게 나는 답했다.


"나도 정말 너랑 비슷해.. 외로움과 우울함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 언제는 또 가끔 그 외로움이 익숙하고 편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고.."


그러자 L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답을 했다.


"맞아. 나도 그래. 근데 나는 어렸을 때 30대의 내 모습을 상상하면 정말 멋지게 살 것 같았거든? 그런데 지금 주변 사람들을 보고 나서 내 모습을 보면, 너무 별거 없다고 해야 하나.. 가끔은 평범보다도 더 작고 초라하다고 느껴지기도 해.. 내가 그리던 30대의 멋진 삶은 이게 아닌데.."


솔직히 말하면 L이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L은 현재 자신이 선택하고, 오랫동안 준비했던 꿈의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 덕분에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L이 지금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다. 무엇보다도 L 자기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기에 내가 생각하기에는 L은 스스로 상당히 만족하면서 지금의 삶을 누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내게 멋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사진 : 2021. 9. 제주도 서귀포>



L과 문자를 마무리하고 몰랐던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나는 '멋있는 삶을 살고 싶어!'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산지 꽤 오래됐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20대 때는 막연하게 30대의 나를 그려보고 기대해보고 그 안에 '멋'이라는 글자를 넣어 화려한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정작 2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실제로 서른을 맞이했을 때, 그리고 30대의 삶을 몇 해 살아본 지금의 나는 '30대의 멋있는 삶'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너는 그래서 지금 멋있는 삶을 살고 있는 거니?'

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느리게나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지금 나의 삶을 보면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도 있다. 그 생각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나는 불안정한 직업에, 그에 따라 불안정한 수입과 상황, 그렇다고 특출 난 경력도 모아둔 돈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지금 내 삶은 멋은 고사하고 그냥 현실감각 떨어지는 무모한 30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생각하는 멋있는 삶'에 대한 그 정의와 기준이 있어야 한다. '멋'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그러하듯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만큼 뭔가 거창하고 화려해야 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멋'만큼 주관적인 게 또 있을까 싶다. 예를 들어 성격과 취향이 정말 잘 맞는 친구와 같이 옷 가게를 가도 서로 집어 드는 옷이 모두 다 똑같을 수 없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인생에서의 멋 또한 같다. 결국 '멋'이란 또 다른 말로 '개인의 취향'과 같은 말이 아닐까.


그러니까 인생에서 멋이라는 것은 나란 사람의 취향대로 살면 그게 멋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꼭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꼭 어떤 것을 이루지 않아도, 그저 나 스스로만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멋있는 인생'이지 더 이상 뭐가 더 필요할까.



우리는 이미 자신만의 '멋'을 지니고, 누리며 살고 있다. <사진 : 2021. 10. 제주도 협재 해변>



이쯤 와서 보니 L이 생각하는 30대의 멋있는 인생이 궁금해졌다. 돌이켜보면 그녀도 20대 때는 나처럼 살고 싶었다고 했었다.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을 살고 싶지만, 자신은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다고 했었다.


맞다. 나도 지금 내 인생에 만족을 하는 만큼 견뎌내야 하는 무게 또한 꽤 버겁다. '자유'라는 단어 뒤에는 늘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숨어있었고, '하고 싶은 일'이라는 말 뒤에는 늘 '책임져야 할 현실'이란 말이 숨어있었다. 이것은 결코 내 삶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누구라도, 어떤 삶일지라도 겉에서 보이는 '멋'과 동시에 당사자가 참고 견뎌내야 했던 무겁고 차가운 '현실' 또한 공존할 수밖에 없다. 그게 우리의 삶이니까.


여기서 바로 '멋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 결정되는 것 같다. 내가 한 선택 뒤에 따르는 '멋'과 '책임'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그 차이로. 나의 선택 후에 따라오는 '멋'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책임' 져야 하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순간, 그 삶은 '멋' 또한 잃기 쉽다.


나 스스로에게 멋있는 삶을 살고 있냐고 물어본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는 이제 조금씩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멋'들은 그 반대의 가치들을 받아들이고 흡수했을 때, 그제야 진정한 '멋'으로 내 삶을 반짝반짝 빛내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L과 대화했던 그날, 자신의 삶이 멋이 없는 것 같다는 L의 기운 없는 말이 한참 동안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늦은 밤, 나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 놓았다.


"00아. 지금 내가 보기에는 이미 너는 충분히 멋진 30대의 삶을 살고 있어.

분명 내가 모르는 어렵고, 힘든 부분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매일매일 너는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며 살고 있잖아. 그리고 예전부터 지금까지도 너는 너를 위한 선택을 신중하게 했고, 노력했고, 그렇게 성과를 만들어냈잖아.


어느 날은 내 인생이 너무 기특하다가도 또 어느 날은 내 인생보다 다른 사람의 인생만 빛나 보일 때도 있지. 사실 나도 자주 그래..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다 부러워하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볼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부분만 보고, 그걸 부러워하는 거잖아.


다시 거꾸로 생각해보면 누군가는 너의 인생 한 부분을 엄청 부러워하면서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건 확실해. 그러니까 누군가가 부러워할 만큼 너는 이미 멋진 삶을 살고 있다는 거 알았으면 좋겠어. 참고로, 그 누군가에 나도 포함이야!"







오늘도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독자분들이 바라봐주시는 따뜻한 시선과 남겨주시는 공감, 댓글은 글 쓰는 저에게 가장 큰 힘이 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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