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힘들어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너는 요즘 네가 마음에 드니..?'
이 문장은 2022년 12월 마지막 주가 시작될 때 다이어리에 대문짝만 하게 쓴 한 줄이다.
당연히 이 문장 속 '너'는 '나 자신'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요 근래 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밉거나 싫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 봤다.
'나는 나의 어떤 모습을 좋아하는 걸까?'
나 자신을 좋아할 때의 내 모습을 쭉 떠올려보았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은 강력한 귀차니즘을 결국 이겨내고 '오운완'을 하고 나서의 내 모습, 내 인생 최대의 기로에 놓인 듯 고민하게 만드는 야밤의 유혹, 엽떡에 넘어가지 않고 '저녁 공복 루틴'을 지켰을 때의 내 모습,
정말 한 글자도 써지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쓰기 싫은 날, 앞머리를 헝클이고 한숨을 푸욱 쉬면서 끝까지 '글쓰기를'마무리 지었을 때의 내 모습.
그렇다.
나는 스스로가 나를 통제할 때의 내 모습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도 귀차니즘에, 엽떡에, 땡땡이에 지고 싶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때론 자의에 의해, 타의에 의해 나의 통제권은 이들에게 넘겨주곤 한다.
그 뒤에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후회 같은 감정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그렇다면 나는 항상 내가 계획한 나의 모습 그대로 살아야만 행복할까?
물론 그것도 아니다. 나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달콤한 일탈은 때때로 필요하다. 스스로의 통제 하에 살려고 노력하는 삶을 근 4년 동안 살아오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짧게) 달콤한 일탈에 빠지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때 나를 자책하고, 후회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히 느껴지는 감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통제력을 과대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19살 고등학교 3학년 이후로 '대입'을 떠올리며 내가 입에 달고 살았던 대사가 있다.
"내가 조금만 더 열심히 했다면..
내가 선택을 다르게 했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여전히 난 이 말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바뀐 점이 있다. 이제는 어떤 결과에 대한 '후회, 자책'과 같은 감정의 원인을 오롯이 '나', '나의 통제권'의 문제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심리학 책에서 읽었는데, 후회와 자책이 심하고 익숙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들이 후회와 자책을 강하게 느끼는 이유는 '나로 인해, 나의 노력만으로 어떤 일이든 다 해낼 수 있다.'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는 나만 잘했다고, 나만 열심히 했다고 모두 다 술술 풀리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이루어낸 것들은 우리의 노력은 물론이고, 우리를 이루고 있는 상황, 사람, 타이밍 등등 모든 것들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러한 결과가 온 것이다.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나의 오만함을 들켜버린 것 같아 뜨끔했다. 그 책을 두 번째 읽었을 때는 그동안 내가 스스로를 향해 상처를 내었던 후회와 자책들의 날카로운 칼날이 보였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자책과 후회를 많이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습관처럼 스스로를 향해 모난 돌을 던질 때도 있지만, 이제는 의식적으로 손에 들린 모난 돌을 내려놓으려고 무진장 애쓴다.)
지난 시간 동안 수없이 나를 미워했다가 다시 안아주기를 반복했다.
특히 2019년, 나는 나의 마음도, 몸도.. 나의 모든 것을 원망만 했었다.
그때 나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내 하루의 삶도 견뎌내기 버거웠기에, 그 하루 안에 타인의 작은 조각 하나 넣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1년 동안은 아주 가까운 친구를 모두 포함해도 만난 사람과 횟수가 다섯 손가락을 넘기지 못할 정도였다.
이러한 시기를 홀로 견뎌내며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것이 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살면서 매 순간, 매일매일 나를 사랑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게 우리 모두의 삶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나를 좋아하지 못할 때, 내가 싫을 때 그때의 나를 그저 인정하는 것.
대신, 그 결과를 모두 나의 탓으로 돌리지 말 것.
나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상황, 사건 또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나를 미워하는 시기가 있어야 나를 진정 알 수 있고, 나를 믿을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길게, 깊게 이어지는 인간관계의 공통점이 있다. 친구이든 연인이든 처음에는 마냥 좋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서로를 오해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권태로움을 느끼기도 하지 않나. 하지만 이런 고비들을 잘 넘겨내면 그 인연들은 우리의 삶 속에 어느새 깊고,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설령 우리가 진심으로 애정하는 친구, 연인 사이를 방해하는 비바람이 분다 해도 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나라는 사람을 데리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이와 같은 것 같다.
언제나 나와 나는 사이가 좋을 수 없으며, 또 나는 나를 항상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평생 나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갈 뿐이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부쩍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때론 내가 싫기도 하고, 때론 내가 너무 좋기도 하는 그 마음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삶이 아닐까요.
진심으로, 나의 삶을 아끼며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그려낼 수 있는 삶이요.
당신의 진심과 단단함을 믿기에 걱정되지 않아요.
늘 그랬듯 당신은 당신답게 당신의 하루하루를 잘 보낼 테니까요."
오늘도 제 이야기를 찾아주시고,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이야기 속 진심을 알아봐 주시고, 응원해주신 덕분에 힘들고 지칠 때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저도 아주아주 오랫동안 여러분의 찬란한 삶을 응원하고, 응원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