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과 정착 사이] 세상에 당연한 두 번째는 없다.
[방랑과 정착 사이] 세상에 당연한 두 번째는 없다. 호주 세컨드 워홀을 못 가게 된 사연
2018년 12월, 집 나간 지 570일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 일주일 정도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살짝 낯설었다. 왠지 새벽 5시에 일어나 카페에 출근해서 커피를 내려야 할 것만 같았다. 아니면 큰 배낭에 짐을 싸고는 내일 자야 할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됐고, 내일 어디서 자야 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여기에는 우리 가족과 우리 집 있었다. 집 나가서 가장 그리웠던 것은 우리 가족과 우리 집만이 줄 수 있는 안온함이었다.
한국에서의 내 계획은 이러했다. 일단 오랜 시간 동안 해외에 있어서 한국에서 처리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했다. 그리고 세컨드 비자 신청 승인이 나면 바로 호주로 떠나려고 했다. 그때 호주 이민성 일 처리가 늦게 되어서 어떤 사람들은 4~5개월을 기다린 후 세컨드 비자가 승인 났다고도 했다. 그런데 나는 호주로 갈 팔자였던 걸까. 비슷하게 비자를 신청한 사람들은 아직 승인 대기 중이라고 했는데 나는 신청하고 1주 만에 바로 세컨드 비자 승인이 확정되었다.
세컨드 비자를 받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한국에서 가족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2019년 4월 즈음 호주로 떠나기로 계획했다. 호주에서 고생하면서 보낸 시간을 보상받듯 한국에서는 여유와 평화 속에서 하루하루 달콤하게 지냈다.
그런데.. 이렇게 순탄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면 내 여행기, 워홀기가 아니지 않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운 좋게 빨리 받은 세컨드 비자는 쓰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계획에 있던 두 번째 세계여행 또한 2024년인 지금까지도 가지 못했다. 그간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내가 두 번째 워홀과 세계여행을 가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건강 문제 때문이다.
2019년 3월 어느 날, 친한 동생을 만나러 부산으로 놀러 갔다. 1년 반 만에 만나는 동생과 즐겁게 하하호호 웃으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갔는데 갑자기 발목이 조금씩 붓더니 걷기 불편할 정도로 아팠다. 병원이 다 닫은 시간이라 급한 대로 약국에 가서 소염진통제와 파스를 받아왔다. 문제는 다음날부터였다. 붓기와 통증도 더 심해져서 아예 발을 땅에 못 디딜 정도가 되었다.
발목은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오른쪽 발목을 시작으로 왼쪽 팔목, 손가락까지 퉁퉁 붓고 아예 움직일 수 없게 아팠다. 처음 동네 정형외과를 갔을 때는 병명도, 원인도 찾을 수 없었다. X-ray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여러 병원을 돌고 돌다가 정형외과 전문 대형 병원에 가서 MRI 검사, 피검사, 소변 검사, 류마티스 관절염 검사 등등 관련된 검사란 검사는 다했다.
다행히 심각한 병은 아니었다. 원인은 체내 염증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서 평소에 많이 쓰던 부위에 염증이 생긴 것이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지금 상태가 심각하기 때문에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입원이었다. 그때 팔과 다리에 통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자지러지듯이 아팠다. 입원하자마자 손목과 발목에 각각 깁스가 채워졌다. 휠체어 없이는 생활을 할 수 없었고, 엄마 없이는 화장실조차 가지 못했다.
나는 의사 선생님께 왜 이런 병이 걸린 건지 여쭤봤다.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오히려 질문을 하셨다.
"환자분, 그동안 손 많이 쓰는 일을 하셨죠? 오래 서서 일하기도 했고요?"
한국에서 바리스타로 오랜 시간 일하기도 했고, 호주 나가서는 1년 동안 내 체구와 체력에 비해 과한 노동을 했다. 워홀 때만 보더라도 일주일 평균 60시간~65시간 내내 몸 쓰는 일만 한 것이다. 그것도 강도가 무척 센 육체노동으로. 이 이야기를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단호하게 답하셨다.
"너무 열심히 일해서 그래요. 환자분은 앞으로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하면 안 돼요. 특히 커피 일은 앞으로 절대 하지 마시고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당분간은 건강에만 전념하라고 하셨다. 이렇게까지 염증 수치가 올라간 경우, 무리를 하게 되면 쉽게 재발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호주 워홀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세컨드 비자 유효기간이 1년이니, 그 안에 회복되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아프고 2달이 지나서야 혼자 걸을 수 있게 됐다. 일상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내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조금만 많이 걷거나 손목을 쓴 날은 아파왔다. 그럴 때면 또다시 그 악몽 같은 나날이 되풀이되는 건 아닌지 너무도 두려웠다. 내가 생각해도 이 몸으로 워홀을 다시 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몸은 천천히 회복이 되고 있었지만 문제는 정신이었다. 당연히 갈 줄 알았던 두 번째 세컨드 워홀과 세계 여행도 못하게 되고, 좋아하던 일인 커피도 못하게 되었다. 억울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나는 그저 열심히 일한 것뿐인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아니, 내게 남은 건 병든 몸뚱이와 허무주의에 절여진 정신뿐이었다. 이제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매일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웠다. 눈 뜨면 가족들 몰래 숨을 죽이고 눈물을 흘렸었다. 진단을 받았던 건 아니지만 그때 난 아마도 심한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깊은 우울함에 빠져있을 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그저 글을 쓰고 있으면, 쓰고 나면 숨이 쉬어졌다. 그래서 매일 같이 도서관에 출근해 글을 썼다. 내 마음속에 있던 말들을 꺼냈다. 그때가 바로 2019년 8월,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 2~3회씩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그러다 보니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내 글이 브런치 추천글에 올라가더니, 다음 메인에도 올라갔다. 많은 사람들이 내 글에 공감해 줬다. 그리고 나란 사람을, 글 쓰는 나를 응원해 줬다. 그때 잊고 있던 내 꿈이 떠올랐다. 맞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늘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여행, 워홀도 못하게 된 거, 내가 예전부터 해보고 싶던 '글'을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오로지 '글만 써보자'라고.
매일 글을 쓰는 삶을 살던 중 같은 해 겨울, 전 세계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졌다. 그때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심적으로 힘들어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매일 출근하는 '도서관' 문은 닫혔고, 매일 걷는 산책로도 폐쇄되었다. 하루의 모든 생활은 '집(잠)-집(글)-집(운동)' 뿐이었다. 아파서 몸 회복하는 데에만 6개월, 글과 운동이 전부인 삶을 1년 3개월 넘게 살았다. 역마살 가득한 나란 사람이 2년 가까이 '병원, 집, 도서관'을 벗어나지 않는 도 닦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람이 이럴 때가 있다. '이대로 가다가 뭔 일이 날 것 같다'하는 순간. 사람도 만나지 않고, 혼자 글 쓰고 혼자 운동하는 삶을 무한 반복하며 살다 보니 이제는 몸속에 역마 DNA가 제발 좀 숨을 쉬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해외는 가기 두려웠고, 제주도로 눈을 돌려봤다. 그때 내 목표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낯선 곳에서 매일 '글'을 쓰는 것이 내 목표였다.
'길게도 아니고 딱 한 달만 제주도에 가서 혼자 글만 쓰다가 오자'라고 마음먹었다. 일단은 비행기표부터 끊었다. 맞다. 이게 내 스타일이다. 어디로 여행을 가던지 항상 이렇게 비행기표부터 사고 보던 나였다. 어느덧 제주로 떠나는 날이 왔다. 한 달 동안 지낼 옷가지들을 넣은 캐리어를 끌고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본가로부터 2~3시간 떨어진 거리를 가보는 것조차 코로나가 터진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은근히 떨렸다.
2020년 11월 22일,
나는 은은히 설레는 마음과 한 달 동안은 '글'에 미쳐서 살아보자는 비장한 마음을 안은 채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훗날 제주에서 펼쳐질 일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오늘도 제 이야기를 찾아주시고,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쓰는 저에게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가장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