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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Oct 23. 2024

호주 워홀, 임금 떼어먹으려는 사장을 만나다.

[방랑과 정착 사이] 나에게 퍼스 워홀이란? 워홀이 내게 알려준 것

[방랑과 정착 사이] 나에게 퍼스 워홀이란? 워홀이 내게 알려준 것



퍼스에서의 워홀을 돌아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훗날 내가 글 쓰려는 사람인 줄 알았던 걸까?'

그 이유는 워홀 생활 중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생겼기 때문이다. 원래 글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사건, 사고는 모두 좋은 '글감'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그 당시 모든 것을 견뎌내고 헤쳐나가야 할 사람은 당사자이지만.)


첫 출근한 날 한 시간 만에 잘린 그 사건 이후로, 바리스타 인터뷰 제안은 많이 들어왔다. 헛된 경험은 없다고 하지 않나. 첫 직장에서 봤던 트라이얼과 한 시간 동안의 첫 근무가 호주 카페 경험에 꽤 큰 도움이 됐다. 해고당한 지 일주일 후, 한 카페에서 인터뷰 - 트라이얼 - 첫 출근까지 모두 무사히 통과했다. 드디어 정식적으로 진짜 첫 바리스타로서의 일자리를 구한 것이다.


하지만 워홀 아니던가.. 하나의 산을 넘으니 또 다른 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 카페는 부부가 운영했는데, 여자 사장님은 어렸을 때 이민을 온 베트남계 호주 국적자였고 남자 사장님은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이 국적자 (부모님은 포르투갈 국적)였다. 둘 다 이민자임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워홀 하는 사람이나 취업 비자로 온 외국 스텝들을 대놓고 차별했다. 게다가 이 부부 둘 다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 외에도 문제는 많았다. 부부 둘 다 사적인 감정 컨트롤이 잘 되지 않아 카페에서 큰 소리를 내면서 부부싸움을 하고, 그 기분을 죄 없는 바리스타나 셰프들에게 풀었다. 여기에서도 호주 국적의 스텝들에게는 뭐라고 하지 않고, 나를 포함한 아시안 스텝들에게 괜한 짜증을 내며 함부로 대했다. (특히 당시 가장 신입이던 나는 그들의 주된 화풀이 대상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그들의 행동에 먼저 일한 셰프들에게 물어보니 이 부부의 언행을 못 참고 많은 직원들이 빨리 관둔다고 했다.



밤 아니고 새벽이다. 트레인 기다리는 중. 아침 7시까지 출근하기 위해서는 아침 5시 30분 첫 차를 타야 카페로 출근할 수 있다.



카페 풀 타임 근무 첫 날, 마감하는 방법 외우려고 사진이랑 동영상으로 다 남겨놨었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살았던 나날들.


처음에 나는 호주 커피 경력도 없고, 이전에 한 시간 만에 잘린 경험 때문에 이 카페에서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했다. 맛집으로 소문난 브런치 카페라서 일이 힘들고, 위치도 멀어서 편도로 1시간 30분이 걸리고, 시급도 다른 곳에 비해 적게 주고, 하루종일 쫓아다니면서 잔소리하는 것, 모두 다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나라는 사람 자체를 인격적으로 무시했고 상처 주는 말을 계속했다. 그 가시 돋친 말과 행동들은 쌓이고 쌓여 카페만 생각하면 스트레스 때문에 심장이 마구 뛸 정도였다.


그게 누가 됐든 '그래도 최대한 좋게 헤어지자'가 내 모토인지라 개인 사정 때문에 2주 뒤쯤에 퇴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 내 생각보다도 더 나쁜 사람들이었다. 내가 퇴사 노티스를 말하고 나서 여자 사장(돈 관리를 맡아서 한다.)은 주급 날, 이전에 2주 동안 일한 내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갑자기 상의해야 할 일이 생겼다면서 세금법을 운운했다. 곧 관두는 직원에게 몇 만 원이라도 덜 주려고 꼼수를 쓰는 것이었다. (이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인터넷에 검색해 봤는데, 임금 못 받는 워홀러들과 동시에 일 시키고 돈 뜯어가는 나쁜 사장이 이렇게나 많은지 처음 알았다.)


바로 호주 노동청에 신고를 해도 됐었지만, 큰 일을 만들기보다 내 선에서 잘 풀고 싶었다. 여자 사장과 날을 잡고 이야기를 하기로 했고, 그 전날까지 영어로 워홀 세금법을 달달 외웠다. 여자 사장은 계속 말도 안 되는 세금법을 지어냈다. 이에 나는 외운 세금법을 정확히 말하면서 공식 홈페이지에서 캡처한 부분을 보여줬다. 그러자 갑자기 "어머.. 워홀 비자로 스텝을 처음 써서 몰랐어.."라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며 이 일은 일단락되었다. (이전에 한국 워홀 친구들이 일을 잘해서 나를 뽑았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었다.)





전쟁의 서막.. 이 메시지를 다시 봐도 화가 난다. 잘 주던 임금을 퇴사 노티스 내자마자 갑자기 상의할 얘기가 있어서 못 줬다는게 무슨 말...





서울에서 진짜 바쁜 카페 일을 오래 해서 잘 안 다치는데 이 카페 일할 땐 자주 디고, 문에 찧이고.. 손이랑 팔이 상처 투성이었다. 다쳐도 걱정해 줄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래도 사장들 빼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다들 좋았다. 사진은 바리스타로 같이 일하던 호주 친구 메이슨 차 타고 집 가는 길에 한글 알려주면서 찍은 사진.



이 일 말고도 퍼스에서는 큰~ 산이 또 있었다. 그때 나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과 집'이 모두 불안정했다. 그리고 알지 않나. 원래 안 좋은 일은 몰아서 온다는 것. 카페에서 임금을 주지 않은 날 메시지, 전화로 사장과 한창 싸우고 집으로 들어간 날이었다. 집주인은 술에 취해 있었고, 내 방문을 두드리며 같이 술을 먹자고 계속 불러냈다.


여기서 잠깐 집주인에 대해 얘기하자면, 40대 중반의 호주 남자이고 20~30대 때 사회생활을 전혀 안 했었다고 했다. (그 집도 자가가 아니라 렌트를 받은 다음 다시 방마다 렌트를 하는 형식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선을 전혀 몰랐다. 그날뿐만 아니라 술에 취하면 늘 안하무인이었다. 그리고 제정신에도 틈만 나면 선 넘는 말을 해서 기분 상하게 하는 건 일쑤였고, 다른 플랫메이트들이랑은 말다툼을 여러 번 했다.


그날도 나는 싫다고 한사코 거절했다. 그럼에도 이미 만취한 집주인은 내 말과 그만하라는 주변 플랫메이트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 집에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아서 무서운 마음에 집 밖으로 나왔다. 밤 12시까지 기다리다가 있을 곳이 없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주인은 그때도 술을 마시고 있었고 나한테 어디 갔었냐며 시비를 붙여왔다. 새벽 2~3시까지 스피커로 노래를 너무 크게 틀어서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했다. 그다음 날 바로 나는 집주인에게 미리 지불한 날짜까지만 살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가격과 위치가 좋아서 불편한 점들을 참고 지냈는데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는 없었다.



퍼스에서 첫 집 이사하는 날! 잘 있어라..



이 외에도 내가 워홀에서 겪은 사건 사고들을 말하자면 따로 연재해야 할 정도로 많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퍼스에서의 워홀이 최악이었냐고 물어본다면, 난 단호하게 답할 수 있다.

'아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것을 퍼스에서 워홀하던 8개월이라는 단기간에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퍼스의 계절과 내 생활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비바람 불던 퍼스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때즈음, 내가 원하던 대로 일도 집도 자리를 찾아갔다.


내가 시티로 나오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투잡을 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잡은 새로운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주 5일 월요일~금요일, 오전 오픈조 고정 시프트를 받았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일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주 6~7일 일본 레스토랑에서 오후 5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했다. 그리고 이 두 일자리 모두 사장님과 스텝이 너무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또 그 집주인을 떠나 새롭게 들어간 집에서 좋은 플랫 메이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국적은 각각 달랐는데 꼭 오래된 한국친구들처럼 서로 케미가 잘 맞았고, 친구들이 정이 참 깊었다. 아침 일찍 나가서 늦게까지 일하는 날 위해 저녁에 일부러 내가 먹을 것을 남겨놓기도 하고, 장 보러 가서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 있으면 선물이라면서 사다 줬다. 서로 시간 맞추기는 어려웠지만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집에서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고, 게임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전부터 워홀에서 꿈꿔왔던 시간들이었다.   



플랫 메이트 친구가 날 위해 만들어준 저녁. 새벽 일찍 일나갔다가 늦은 밤에 퇴근하고 확인했는데..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그래서 나도 내 거 만들면서 플랫 메이트 친구들 밥도 따로 만들어서 이렇게 식탁 위에 올려뒀었다. 이게.. 바로 내가 꿈꾸던 온기가 있는 집..이다!




세컨드 잡이던 일식 레스토랑에서는 동료들과 회식도 했다. 사장님이 무제한 생맥주를 쏴주셔서 새벽 3시까지 웃고 떠들다가 집으로 왔다.  








퍼스에서 '몸과 마음 고생했던 시간 vs 즐거웠던 시간'을 따지자면 고민할 것 없이 '몸과 마음 고생했던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고생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고생'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는 자기 일처럼 나를 도와줬던 동생들이 있었다. 직접적으로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내 걱정이 돼서 전화 한 통 더 해주는 마음, 늦은 밤까지 자기 일처럼 얘기를 들어주고 화를 내주는 마음, '언제든 올 테니까 일단 전화해'라고 말해주는 든든한 마음이 나를 지켜줬다.


야채 공장에서와는 다르게 0부터 10까지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서 그랬을까. 힘들고, 속상한 일도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퍼스에 정이 단단히 든 것 같았다. 퍼스의 가장 큰 인터넷 카페 이름은 '퍼스,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다. 퍼스에서 지내던 당시에는 '왜지? 이렇게 외롭고 고된 퍼스가 뭐가 그립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퍼스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 카페 이름을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퍼스에서의 달콤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한창해 나가고 있을 때 워홀 1년 비자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 내 계획은 한국을 떠난 지 500일이 훌쩍 넘었기 때문에 한 번 한국에 들렀다가 세컨드 비자를 쓰러 다시 호주 퍼스로 돌아오려고 했다. 퍼스에 있는 친구들에게 "나 한국 갔다가 1~2개월 후에는 다시 돌아올게~ 그때 보자!"라고 웃으면서 인사하며 헤어졌다. 진짜로 곧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고.


때는 2018년 12월. 퍼스에는 무시무시한 무더위가 찾아온 한 여름이었다. 이제야 뜨거운 호주의 여름을 맞이할 때가 됐는데, 나는 다시 한국의 겨울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2019년 한국 겨울은 따뜻하리라 기대했다. 1년 7개월 만에 가는 집이었다. 보일러의 온기가 가득 찬 작은 내 방이 참 그리웠다. 그렇게 나는 1년 7개월 간의 첫 번째 세계여행, 첫 번째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집으로 잠시 돌아갔다.



과연 '잠시' 돌아간 것이 맞을까..?




겨울이 지나가면서 점점 맑고 높고, 파란 하늘이 자주 찾아왔다.




노을 러버로서, 서쪽 도시인 퍼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지.





참 좋아했던 바닷가. 코테슬로, 그리고 노을.





호주의 벚꽃, 자카란다. 우리 집 앞 버스 정류장 뒤로 활짝 핀 자카란다 꽃. 퍼스가 보랏빛으로 물들었을 때 나는 이 아름다운 퍼스를 뒤로하고 한국으로 향했다.






★ 본 브런치 북은 매주 월요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찾아주시고,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쓰는 저에게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가장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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