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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승 Jan 25. 2020

뜀박질 있었던 국민의례

국기에 대한 경례 다음 바로는?

시간이 악마처럼 잔인하게 다가왔다. 단 1분만 더 있으면 살아날 수도 있었다. 그 간의 모든 고생이 눈 앞에서  물거품이 되어 아른거렸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자고  할까? 약력 소개를 맨 마지 순서로 바꿀까? 국기에 대한 경례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예행연습 때 국민의례에 필요한 시간을 재 보니 모두 5분 40초가 렸다.  딱 1분만 더 시간을 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등이 모두 포함되었을 때 5분 40초였고, 애국가를 2절까지 제창하게 하고 싶었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애국가는 1절만 부르는 것이 당연했다.


처음부터 사연이 많은 행사였다. 기관장 취임식은 인사부에서 주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인사부에서 바쁘다는 이유로 기획부에 행사를 해 달라 부탁해서 맡게 된 것이었다.


의전 행사는 잘해야 본전이었다.  잘해 봐야 티도  안 나고, 실수 하나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망하는 것이 의전이었다.

게다가 이번 인사는 기관장이 취임하는 행사인 만큼  작은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기관장은 취임식에 신경을 많이 썼고, 세세한 사항에도 관심을 표시했다. 조직이란 윗분이 방귀를 뀌면  아랫사람은 똥을 싸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협조가 필요한 부서의 부장은  불만이 많았다.  인사부에서 주관해야 하는 행사를 기획부에서 신임 이사장에게 잘 보이려고 빼앗아 갔다고 오해하는 모양이었다.


그 부장이 토라져 있어 행사장을 꾸미는 일과 내외 귀빈들의 식사 준비 등 부대 행사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기관장 취임을 축하하는 내용의 펼침막이며, 국기와 기관 깃발, 귀빈들이 자리배치, 음향효과 등을 여러 차례 확인했고 리허설도 반복되었다. 또한 참석할 외부 인사들에게 연락을 하고 참석여부를 점검하는 것도 실수가 없어야 했다.


행사시간, 내외 귀빈이 모두 자리에 앉은 후 새로 부임한 기관장이 마지막으로 입장했다.  국민의례가 시작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 제창이 시작되었다.


행사 직후 약력소개를 은 윗분이 약력소개 자료를 찾았다. 리허설 때 사용하고 그대로 사회자석에 놓아두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서둘러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자료는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전기 나간 컴퓨터처럼 먹통이 되었다.


국민의례가 끝나면  다음 순서가 약력소개 순서였다. 일반적으로 약력소개는 출신학교와  주요 경력 정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신임 기관장님은 자세한 소개를 원해서 , 약력소개라기엔 이례적인  A4 쪽 정도의 소개자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단 1분이라도 시간이 간절히 필요했다. 1분을 더 얻을 수 있으면 영혼이라도 팔아 버렸을 것이었다.  그 자료를 다시 출력해서 가져와야 하는데,  행사장은 10층, 우리 부서는 7층이었다.


차장 한 명이 자료를 가지러  급히 달려 내려갔다.  국민의례가 끝나도록 자료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행사도 엉망이 되고, 나도  끝이었다.


이곳에 와서 3년이 넘도록 그야말로 개고생을 했고, 과로에 쓰러지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일 꿈만 계속 꿀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림 by 유예린>


온갖 종류의 행사를 치러 봤고, 웬만한 행사라면 적당한 말솜씨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기관장 취임행사는 말솜씨로 적당히 넘어갈 성격의 행사가 아니었다.


순국선열에 대 묵념이 시작되고 좌중은 음악에 맞춰 묵념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연신 시계와 출입구를 번갈아 가며 식은땀을 흘렸다.  위경련이 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경련이 따라왔다. 위경련이 시작되면 심한 고통으로 서 있기도 힘들고 얼굴이 시체처럼 하얗게 변하면서 식은땀으로 온몸이 졌었다.


묵념이 끝나갈 무렵 차장이 조용히 출입문을 열었다.  묵념 시간에 소리를 내며 좌중 앞을 지나가기는 어려웠다.  다 무시하고 어서 달려오라고 손짓을 했다.  묵념 시간에 바삐 달리는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행사는 그리 끝났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했을 만큼 깔끔하니 마무리되었다.

시간이 정해진 행사들은  잘하던 못하던 끝나는 개운함이  있어 좋았다.


 그 날 오후, 장난기 있는 직원들이 나를 볼 때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를 했다.


국민의례 시간에 사회를 보면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바로를 안 해서  아직 손을 못 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셧다운 되어 국민의례 시간에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그 후에도 왼편 가슴에 손을 올리고 인사하는 직원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웃으며 "바로"라고 해 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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