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강남일식집에 가서 쏜다!". 부장의 회식 통보가 있었다. 당일 아무 시간이고 부장이 말하면 회식 시간이 되었다. 강남? 부장의 선언에 직원들은 뭔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부장은 짠돌이었다. 그가 남을 위해 10원이라도 쓴 적이 없었다.
우리들에게 강남은 보이지 않는 국경선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다른 세상이었다.
우리 직원들 중에 강남에 가서 호사를 누려본 직원은 거의 없었다. 강남이 우리가 일하는 구로에서 멀기도 하거니와 봉급을 생각한다면 언감생심이었다.
부장이 "내가 한 턱 쏜다"라고 했다 해서 실제 그가 돈을 쓴다고 생각하는 직원은 없었다. 그는 출장비며 부서 관리비 등 모든 돈주머니를 직접 관리했다. 큰 선심 쓰는 양 해도 결국 직원들에게 돌아갈 돈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에 불과했다.
강남에 위치한 일식집은 구로역 인근에서 보아 왔던 횟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선 물수건이 소독약품 냄새 풍기는 싸구려 가 아니라, 뜨끈하게 데워진 두툼한 수건이었다.우리는 막 탈옥한 죄수 마냥 그 식당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며칠 전 우리 부서의 막내 일용직 여직원이 계약직으로채용되었다. 모두 당연하게 여기는 일이었다. 보통 일용직으로 일하다 계약직 직원이 퇴사하거나 승진해 자리가 나면 일용직 사원 중에서 일 잘하고 경력이 많은 직원이 계약직이 되었다.일용직 직원들에게는 계약직 자리가 희망이었다.
계약직이라고 해도 해고의 위험만 없을 뿐 박봉은 매한가지였다. 거기다 그 직원은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 처지를 모를 리 없는 부장이 그 계약직 사원에게 정규직이 되었으니 직원들에게 한 턱 내라는 소리를 공개석상에서 떠들었다.
부장에게 불려 갔다 나오는 그 직원의 표정이 어두워 이유를 물어보니, 역시나 한 턱 타령을 했단다. 여직원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직원들은 고급스러운 일식집 분위기에 입이 쩍 벌어졌다.고급스러운 인테리어며, 음식이 담겨 나오는 그릇들이며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까지.. 강남은 역시 강남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by 유예린〉
그런데 화려하지만 별로 먹어볼 것이 없는 음식이어서 우리 촌놈들 성에 차지 않았다.
구로역 근처 횟집에서는 싸고 푸짐한 회와 밑반찬에 소주를 곁들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고, 윗사람들 흉 보기며 직장의 애환이 거침없이 오가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 횟집의 음식은 모양만 그럴듯했지, 회 서너 조각 집어 먹고 나면 접시 위에 한 두 조각 남은 회를 서로 눈치를 보아야 했다.
처음부터 이상한 점은 음식을 주문하는 방식이었다. 아예 주문 절차가 없었다.
그냥 사장님이 다 알아서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부장과 사장님 간에 사전에 예기가 되었나 생각했다.
그런데 차례로 나오는 음식에 부장님도 놀라는 눈치였다. 작심하고 매출을 올리려는지 술도 주문에 신경 쓰지 않고 비싼 종류를 가져다 놓았고, 한 사람당 딱 한 조각씩 돌아가는 각박한 음식들도 종류별로 제법 나왔다.
부장이 주머니 속의 돈을 계산하는지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고 있었다.
잠시 후 부장이 드디어 사장님에게 한 마디 했다. 여보, 흐흐흐 나 돈 없어. 그만 가져와.
그 횟집의 사장님이 부장의 마누라였다.
회식은 그리 어정쩡 끝났고, 우리는 잘 먹었노라 인사치레를 공손히 했다.
그 일식집에서 나온 후 인사를 했지만 우리는 헤어지지 않고 구로역으로 자리를 옮겨 허기지고, 아린 마음을 소주와 순대볶음으로 채웠다.
그 자리에서 난 막내 직원과 부장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며칠 전 막내 정희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좀 보자고 하더라고, 원래 표정이 밝은 사람인데 그리 수심이 가득한 걸 보니 뭔 일이 있다 싶었지. 회의실에서 예길 들어보니 부장이 돈 예길 한다는 거야. 일용직에서 계약직 되었으니 직원들에게 한 턱 내라는 거지"
"지난주 회의 때 부장이 지나가는 말로 한 턱 이야기를 해서 농담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네요?" 향란 과장이 올라오는 화를 다스리려는지 못 마시는 술을 털어 넣었다.
내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 얼마를 내놓으라 하던가" 정희에게 물었더니 부장이 금액은 이야기를 안 하고 매일 한 두 번씩 불러서 미치겠어요. 하더라고""
정말 개새끼네! 정희가 몇 년을 일용직으로 온갖 허드렛일 다 하고....." 재영 대리가 거기까지 말하고 분통이 터져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상하관계가 명백한 조직에서는 아무리 상사 흉을 보더라도 "부장님", "차장님"처럼 존칭을 붙이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 직원들이 술자리에 서 나마 상사에게 욕을 한다는 것은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부장이 아직 결재를 안 했더라고... 정희 계약직으로 채용하는 서류 아직 부장 책상 서랍에 있어.. 그러니 지금이라도 부장이 트집 잡아 일을 틀면 정희는 망할 수 있어" 나의 말에 직원들이 한탄을 했다.
소주가 두어 순배 돌았다. 그동안 모두 말이 없었다."어떡하겠어.. 정희 사정 어려운 건 우리가 다 아는 것이고... 내 통장에서 일단 삼십만 원 찾아서 정희 손에 쥐어줬어.. 일단 고비는 넘겨야 하니까... 그 돈으로 오늘 부장 마누라 좋은 일 시킨 거지" 동료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결국은 부장의 못된 짓에 맞장구를 친 것이었다.
재영 대리가 결심을 한 듯 말했다. "내가 같이 잘리더라도 그 새끼 몰아내렵니다.""여기 모인 사람들 다 같은 마음일 거야, 그런데 어설프게 했다가 증거 부족하다 해서 일 망치면 정희도 우리도 다 망할 수 있어." 누군가 그 말을 했고, 일리가 있었다.
정희가 자원해서 직원들을 위해 한턱냈다고 우기면 그 또한 말이 될 수도 있었다. 막차 시간이 되어 술자리가 마무리되었다.
그 후에도 몇 번의 모임이 이어졌다. 필요한 일들을 착착 준비했고 싸움에서 우리가 이겼다. 그 지사 직원들에게는 부당함에 함께 맞섰다는 자부심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