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은 모르지만 '나'의 글은 쓸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네 멱살을 잡고 책상 앞에 앉히면
-어딘(김현아), 활활발발
질투는 보통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에서 비롯될 것이다. 글쓰기의 영역도 그렇다. 약간 잘 써진 글을 보면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수 있지만, 차원이 다른 문장, 부단히 글쓰기 기술을 연마해도 나는 결코 쓸 수 없으리라는 걸 아는 문장을 보면 질투는커녕 감탄과 탄복만이 나온다. 전율이 일거나.
그때의 머릿속의 생각과 감정이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면 그 감정의 모습은 분명 놀라서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오늘 나의 생각의 입을 다물어지지 않게 만든 분은 어딘(김현아) 작가님이다. 와. 이야기가 나의 멱살을 잡아 책상 앞에 앉힌다고? 그 창의적 발상에 나는 그저 탄복하고 만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나도 한마디로 대답했다. 3백 명의 작가를 네 안에. (중략)
"한 작가를 안다는 건 그가 살아온 곳의 지형과 그 지형이 만들어낸 수많은 생명들, 순록 여우 물소 코끼리 기린 나무늘보 캥거루 은사시나무 동백나무 자작나무 고사리 냉이 튤립 가오리 돌고래 망둥이 전갱이 블루베리 파파야 모자를 삼켜버린 뱀 사막을 건너는 쌍봉낙타 등등이 내 안에 함께 산다는 거지. 그다음은 그냥 그대로 두면 돼. 그들이 어울려 저절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 거든. (중략) 너는 그저 손이나 빌려주면 되는 거지. (중략) 결국 이야기가 네 멱살을 잡고 책상 앞에 앉히면, 할 수 없지, 쓰는 거지, 어쩌겠어."
-어딘(김현아), 활활발발
이야기가 내 멱살을 잡고 책상 앞에 앉힌다고? 점잖게 "책상 앞으로 가시지요."라고 권하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멱살을 잡아서 도저히 안 갈 수 없도록 끌려가는 모양새로 질질 끌려갈 정도로 이야기에 사로잡힌다고? 정말 그런 날이 올까.
나의 입장을 말하자면 화내지 않을 테니, 불평하지 않을 테니, 옷이 늘어난다고 컴플레인하지도 않을 테니 그저 그저 제발 이야기에게 나의 멱살을 내맡기고 싶은 심정이다.
부디 이야기가 나의 멱살을 잡고, 끌고, 혹 필요하다면 패대기를 쳐서라도 내 안에 있(기를 바라)는 그동안 읽은 책의 모든 작가들을 소집해서 한 번도 가닿은 적 없는 세계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 주기를. 손은 얼마든지 빌려줄 테니 부디 그렇게 일해주기를. 그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잘 써진 글 까지는 염치가 없어 바라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글을 쓸 수 있기를. 그러기를 바라본다.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