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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Sep 27. 2023

너를 사랑하는 시간

가루쿡과 종이 접기의 세계 속에서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오늘은 이 문장을 소환해 응용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에서 나를 위한 한 구절을 추가해서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하루에 일. 정. 시간) 너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라고.  

  혼자 비교적 잘 노는 아이를 키우고 있다. 좋아하는 것에 꽂히면 몇 시간도 혼자 놀 수 있는 아이를. 그럼에도 가끔 나를 호출하는 시간이 있다. 일정시간 자동차 놀이와, 마술놀이의 관객, 각종 역할극등에 동원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기꺼운 동원은 만들기의 시간이다. 

세심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본의 만들기 재료들을 좋아한다. 

 가장 먼저 접했던 만들기 재료는 우리나라에 '가루쿡'으로도 알려진 포핀쿠킨(ポッピンクッキン)이었다. 참고로 '포핀쿠킨(ポッピンクッキン)'은 가루와 물을 섞어 만든 간식을 통용해서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익히 알려졌을지 모르나, 일본에 와서 처음 포핀쿠킨을 접했을 때 나로서는 신세계를 만난 기분이었다. 다양한 세트 구성에 따라 가루와 물을 섞어 정교하게 타코야끼를 만들고, 햄버거를 만들고, 초밥을 만들고, 도시락을 만들고,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세계라니. 다양한 세트를 열어보고 그 세심한 구성과 재료에 놀라 매력을 느꼈다. 일상 속에서 접하는 일본의 어떤 것들을 보며, 일본은 세심함에 특화된 나라라는 느낌을 받는다. 어린이용 만들기 재료를 봐도 작디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구현하려는 제품들을 보면 왜 그토록 '장인정신'이 이곳에서 특화된 개념인지 알 것만 같다. 

 아이의 호출에 응한 나는 아이와 포핀쿠킨 상자를 하나 개봉해 조리법에 따라 차근차근 만들어 본다. 세트에 있는 색색의 가루들과 정량의 물을 트레이에 붓고 잘 섞어서 굳히고 때로는 전자레인지에 가열하고, 모양을 만들며 아이도 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좌)타코야끼 만들기에 열중하는 아이, (가운데)만들어진 도시락(우)실제 판매되는 상자에 그려진 견본 도시락

 물론 가루가 흩어지는 번거로움도 감수해야 하고, 만든 결과물이 견본과 많이 다를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것들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작업할 필요는 없으니깐. 

 그럼에도 나로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 먹는 것이라는데 있다. 어차피 적은 양이니 건강을 이유로 들어 아이에게 먹지 말라고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것은 나의 비위에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 먹을 수 있는 재료들(젤리, 빵, 과자 등)이고, 만들기 전에 손도 깨끗하게 씻었고, 심지어 냄새도 무척 멀쩡하나, 맨손으로 한참을 조물 거리며 만들고, 색상조차 휘황찬란한 그것들을 보면 절대로 맛이 궁금하지 않다. 아이는 본인이 즐겁게 만든 결과물이고, 달거나 임팩트 강한 그 맛에 거부감이 없고 맛있는 것을 나누고 싶은 순수한 마음으로 내게 선심 쓰며 권하는데, 그 밝은 표정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맛있게 먹는 것이 기대에 부응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마지못해 웃으며 간신히 조금 맛보는 것에 그치며 그런 나의 모습이 상처가 될까 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부디 즐겁게 만들었던 시간만이 아이의 기억에 남기를 바라본다.

정교한 내부 구성품. 겉 표지와 똑같이 만들 수 있게 모든 재료가 들어있다. 

 다음으로 기꺼워하는 호출이 있다면 종이 접기이다. 무작위로 손 가는 대로 접는 종이접기 말고(그것이 아이의 창의성에는 더 좋을 수 있으나;), 세트화되어 나온 종이접기 제품들을 접어보는 시간을 반기는 편이다. 각종 초밥들과, 케이크, 배, 자동차... 디테일이 특화된 나라답게 온갖 종류의 것들을 종이로 예쁘게 접을 수 있도록 종이접기 세트가 제품화되어 있다.  

오늘의 종이접기 컨셉은 파티쉐. 케익과 쿠키를 담을 상자와, 예쁜 접시 접기까지 구성품으로 들어있다.
제품이 입체라서, 종이로 접었을 뿐인데 그럴싸하다. 위에 올릴 과일까지 접어서 장식하도록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나는 아이와 포핀쿠킨을 만들고, 종이접기를 하며 아이의 부름에 응한다. 그럼에도 언제나 시간을 내주는 것에 인색한 나는 아이의 부름에 기꺼워하지 않거나 제한을 두는 경우가 잦다. "와봐."라는 부름이 몇 차례 이어지면 나의 인내심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 "지금 한 번만 가고 이제는 그만 갈래."라고 기어이 살짝 짜증이 섞인 답변을 내놓는 날이 잦다... 

 그럼에도 나는 알고 있다. 아이와 포핀쿠킨을 만들고, 종이접기를 하는 이 시간들이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쩌면 내 생각보다 이 시간이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이는 생각보다 빨리 자라서 조금씩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다가, 마침내는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들을 보내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알면서도 오늘의 인내심은 먼 미래보다 나를 직접적으로 자극하고 나는 번번이 그것에 진다... 지고 싶어서 진다.   

 지금 나만의 시간을 그리워하듯, 언젠가는 아이와 함께 하던 시간을 눈물 나게 그리워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현재를 사랑하는 것뿐임을 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꺼이 나의 시간을 내주자 마음먹어 본다. 나는 결코 나를 잃지 않을 테니, 지금은 내줄 수 있을 만큼 나의 시간을 내주고, 조금 더 애틋하게 여기자 마음먹어 본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란가츠(ラン活)'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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