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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Dec 02. 2023

'나'로 사는 일

'내'가 되는 삶의 여정

남의 인생을 사는 것 같아.

 군인시절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남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비로소 담담하게 쓴다. 당시는 대부분의 날들이 '존재하는 자체로 죽을 것 같이 괴롭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남의 인생을 살고 있다. 나는 남의 인생을 사는 것 같아.' 나는 자주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진작에 안다. 군인은 나쁜 직업이 아니었음을. 군인은 단지 '당시의' 내게 맞지 않는 직업일 뿐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때는 '군인'이라는 직업자체에 부정적인 생각을 얹었다.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어떻게든 긍정의 기운을 끌어올리기 위해 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적성에 맞지 않는 일도 그렇게 잘하는데, 적성에 맞는 일을 만난다면 얼마나 날개를 단 듯 잘 해낼까 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결국 군인의 일을 잘 해낸 지는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알면 행여 상처가 될까 봐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당시는 어느 순간 잠깐씩 그렇게 생각했다. 훗날을 위해 내게 맞지 않는 일도 잘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노력해서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내자고. 그리고 나중에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며 날개를 달자고. 물론 그 생각은 자주 현실의 고비를 만나서 무너지며 '와 진짜. 전역의 날이 오긴 오는 걸까. 진짜 그날이 정말로 올까'의 결론으로 자주 이어지는 것이 나의 한계였지만. 

 다른 하나의 생각은 '이 일이 적성이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었다. '내게는 많은 부분이 즐겁지 않고, 힘든 이 일이 내게 적성이 아니어서 다행이구나. 이 일이 적성이라면 계속해야 했을지도 모르는데, 적성이 아니어서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겠구나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어느 시간들을 버텼다.  

 전역 후 군인의 삶을 살았던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삶을 산 시간이 훨씬 길어져 기억도 감정도 감각도 많이 희미해졌지만, 책의 어떤 구절이나 그 시절이 연상되는 일을 만나면 불현듯 그 시절의 나와 마주한다. 오늘의 계기는 정여울 작가님의 '끝까지 쓰는 용기'였다.


 나는 학교를 '더 나은 교육의 장'으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학교 측에서는 나를 '조직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 1년 후 재계약이 되지 않자 내 마음의 상처는 컸다. (중략) 두 달간 잔뜩 웅크리며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 과연 조직 생활은 절대로 잘 해낼 수 없는 외톨이형 인간일까'라고 자문해 보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예전과는 다른 대답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바보야, 너 정말 절망한 것 맞니? 넌 조직 생활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너 자신을 찾은 거야. 정말 아직도 너 자신을 모르겠니?' 예전과 달리 엄청나게 박력 있고 확신에 찬 내면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정여울, 끝까지 쓰는 용기 중


 대학 초빙교수 임용 경험을 바탕으로 적은 정여울 작가님과 나의 상황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아픔을 겪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며, 점점 더 자기 자신에 가까워지는 일. 진정으로 알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자기 자신으로 되어가는 일. 결국 삶의 본질은 그것 아닐까. 

 지난 시간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고 끄집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군 생활이 내게 준 의미를 종종 떠올린다. 그 시간 나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고, 내면의 밑바닥도 보았지만(그것이 밑바닥일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던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결국 '쓰는 일'을 발견한 것. 쓰는 일에 대한 마음속 갈망을 처음 알아채기 시작한 것이 그때였다. 쓰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지만, 그때 이미 쓰면서 나 자신이 되어가는 일의 여정은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득문득 그때의 기억이 발화점이 되어, 예측하지 못한 순간 마음을 헤집어 놓을 수도 있다는 것. 달리말하면 영감을 줄 수도 있다는 것. 이제는 그 시절의 나와 마주하는 일이 반갑기까지 하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삶의 어느 한순간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삶을 힘껏 껴안을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렇게 힘껏 삶을 껴안으며 살다 보면 또다시 점점 더 나 자신이 되어갈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지난 시간들로 인해 마음에 희망이 깃든다. 

 그 기운을 놓치기 전에, 급하게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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