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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Mar 19. 2024

추억이 만들어준 ’이자카야(居酒屋)‘ 요리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하며

도쿄(東京)에서 일본어를 배우던 유학 시절, 저녁 시간은 신주쿠(新宿)에 위치한 이자카야(居酒屋)에서 홀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이가 많은 여자분께서 운영하시던 가게였다. 그를 ’오카미상‘(女将さん, 여주인)이라고 부르며, 그가 만든 요리들을 홀에 앉은 고객에게 내어주는 것이 당시 나의 일이었다. 

-失礼いたします。枝豆でございます。(실례하겠습니다. 풋콩입니다.)

-失礼いたします。ポストサラダでございます。(실례하겠습니다. 감자샐러드입니다.)

-失礼いたします。冷奴でございます。(실례하겠습니다. 냉(冷) 두부입니다.)

 손님 앞에 요리를 내어주며 읊던 문장을 기억한다. 매뉴얼에 입각한 대사였을 뿐 그 요리들을 알지 못했다. 나는 에다마메(枝豆, 풋콩), 포테토사라다(감자샐러드), 히야얏코(冷奴, 냉 두부) 등의 이름을 가진 이자카야의 요리들이 궁금했지만, 그 요리들을 알아갈 기회는 없었다. 이자카야의 일은 대체로 바빴고, 가끔의 간식시간 사장님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닭튀김이나 구운 떡 등 내게도 익숙했던 간식을 만들어 주셨다. 시간이 흘러 유학 생활은 끝났고, 궁금했던 요리들에 관해 알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일본과의 인연은 끝이 아니었고, 삶의 한 치 앞도 알 수 없음을 실감하며 한참의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발견했다. 이자카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간 수없이 읊던 대사들이 내게 각인(刻印) 되어 있었다는 것을. 심지어 몇몇 요리들은 지나치게 보편적이어서 의식하지도 못한 채 만났다는 것을. 그럼에도 아직 만나지 못한 요리가 있었고, 나의 어느 한 시절을 품고 있을 그 요리들을 만나고 싶었다.  


포테토사라다(ポテトサラダ감자샐러드)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는 요리이다. ’샐러드(salad)‘라고 하면 그 요리가 지닌 특유의 느낌을 표현할 수 없으니 ’사라다‘라고 발음하는 편이 좋겠다. 이자카야의 사장님은 한 번씩 대량으로 ’포테토사라다‘를 만들고, 손님이 주문하면 오목한 접시에 양배추를 깐 뒤 ’포테토사라다‘를 한 스쿱(scoop) 씩 올려 손님에게 내갔다. 만들어지는 전(全) 과정을 본 요리였기에, 몇 번 만들어 가족들과 나눠 먹었다. 

 찐 감자를 식힌 뒤 으깬다. 감자가 식을 동안 양파, 당근을 채 썰고 오이는 반을 갈라 반원형의 상태로 얇게 썰어준다. 손질한 오이는 소금에 살짝 절인 뒤, 헹궈 물기를 짜둔다. 으깬 감자와 채 썬 채소들을 마요네즈로 골고루 버무린다. 기호에 따라 소금, 후추를 첨가해 간을 맞춘다. 먹을 때 채 썬 양배추를 곁들여도 좋다. 특별한 손맛이나 별다른 기술이 필요 없는 요리이고, 감자의 단백함과 마요네즈의 고소함이 채소와 어우러져 산뜻한 포만감을 준다. 쉬운 난이도에 비해 만족감이 높다. ’포테토사라다(ポストサラダ)‘는 마트, 식당, 편의점 등등 곳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데, 재료 본연에 맛에 충실한 요리라 어디서 사도 대체로 맛있다. 

에다마메(枝豆풋 콩)

국민적으로 사랑받는 ’에다마메(枝豆)‘는 일본 전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단백질,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하고 콜레스테롤을 낮춰주는 등 영양이 풍부해 어린이들이나 학생들에게 간식이나 급식으로도 자주 제공되며, 고소하고 담백한 맛으로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어 술안주로도 인기가 높다.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에다마메‘를 껍질째 깨끗하게 세척 후, 끓는 물에 소금을 조금 넣고 3-5분 정도 데쳐준다. 마트에 가니 초봄의 햇 콩이 나와있어 아르바이트의 추억이 담긴 ’에다마메‘ 요리를 만들었다. 갓 데친 따뜻한 ’에다마메‘를 껍질을 벗겨가며 먹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가 알려준다. 유치원에서 껍질째 먹는 거라고 배웠다고. 의아한 마음으로 껍질째 맛을 보니,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초봄의 ’에다마메‘는 ’줄기 콩‘처럼 껍질의 이물감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고소하고 은은한 단맛을 품은 갓 데친 ’에다마메‘를 먹으며 왜 ’에다마메‘가 그토록 보편적인 사랑을 받는지 온전히 이해했다.      

히야얏코(冷奴냉 두부)

 일본에서 제법 보편적이지만,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아 먹어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자카야에서 서빙하며 외양을 보고 두부라고 추측했는데, 두부(とうふ, 豆腐)라고 불리지 않아 정체가 궁금했다. 역시 두부 요리였고, ’히야얏코(冷奴)‘라는 이름의 유래는 '차가운'이라는 뜻의 '히야'(ひや, 冷)와 '노예'라는 뜻의 '얏코'( やっこ, 奴)를 합친 말로, '얏코'는 일본 에도 시대 말기에 사무라이의 하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네모나게 썰어 담은 두부의 모양을 에도시대 하인의 의복 어깨에 붙은 정 사각형의 문양에 빗대어 ’히야앗코‘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출처:나무위키). 먹어본 적이 없어 어떤 요리일까 짐작이 안 되어 식당에서 주문해 맛을 보았다. 맛을 보니 ’쪽파를 올려 취향껏 간장을 뿌려먹는 차가운 연두부‘라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맛이었다. 메뉴 특성상 주메뉴가 아닌 사이드 메뉴로 분류되어 덮밥집이나, 이자카야 등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궁금함에 비해 간단한 요리였지만, 오랫동안 궁금했던 요리를 마침내 만나 반가웠다. 


 음식은 ’먹는 것‘ 외에 많은 의미를 지닌다. 먹고, 교제하고, 마음을 전하고, 위로를 안겨주고... 음식이 가진 다양한 의미를 떠올려 보면 ’먹는 것‘은 음식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일 뿐, ’음식‘은 ’음식‘ 자체를 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음식을 넘어선 음식‘이 가진 기능 중 하나는 ’기억의 저장소‘ 아닐까. 오래전의 내가 손님 앞에 가지런히 놓아주던 ’포테토사라다‘와, ’에다마메‘와, ’히야얏코‘를 떠올려본다. 그 음식들은 ’유학시절의 나‘의 기억을 담고 있다. 시간이 지나 그 음식을 다시 먹으며, 이제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그 음식이 담고 있는 ’그때의 나‘를 본다. 한 치 앞만 보며 자주 전전긍긍했고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해하던 그 시절의 나를. 그때의 나는 그 시절만의 아름다운 빛을 품고 있었고, 당시의 불완전함이 사실은 그 시절의 완전이었음을 알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때로는 넘어지고 휘청였지만, 그럼에도 그 후의 나의 삶은 여전히 잘 흘러왔음을 안다. 오래전의 내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그 시간을 온전히 누려도 좋았을 것을 시간의 흐름으로 얻은 약간의 지혜로 뒤늦게 깨닫고, 그 시절의 나를 본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 시절의 나를 격려해 배웅하고, 다가올 시간 들을 불안해 말고 누릴 것을 생각해 본다. 

 추억이 만들어준 요리를 앞에 두고, 성실하게 요리를 나르던 지난 시간의 나와, 주어진 삶을 잔잔한 열정으로 살아내는 지금의 나, 지금보다 현명해지길 기대하는 앞으로의 나에게 초대장을 건넨다. 함께 이 요리를 먹고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 보자고.  


이 글의 원문은 소믈리에 타임즈 '요리의 말들' 칼럼 https://www.sommelier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807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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