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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Apr 10. 2024

카레(カレー)의 재(再)재재 발견

 카레는 의무적으로 먹던 요리였다. 카레에 관한 오래된 기억들을 떠올려 보면 기꺼웠던 요리는 아니었다. 학창 시절의 수련회에서 짜장과 더불어 한 끼를 담당했거나, 학교 급식에서 일정 주기로 제공되던 요리. 카레가 주메뉴인 끼니를 마쳐야 급식실에서 나가고, 수련회의 다음 프로그램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요리. ‘맛있음’보다 ‘의무감’에 가까웠던, 때로는 ‘먹어치워야’ 했던 요리. 그것이 내게 개별적인 카레의 의미였다.

 오랜 시간 저평가되던 카레의 이미지를 재고(再考) 하게 된 첫 계기는 일본식 프랜차이즈 카레 식당의 방문이었다. 카레 전문점을 친구와 방문했던 마음은 호기심이 거의 전부였다. 의무감으로 먹던 카레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의 ‘카레 맛’에 관한 호기심으로 그곳을 방문했다. 우리는 각자의 기호에 따라 카레의 주(主) 재료와 단계별 맵기, 토핑(돈가스, 치킨, 소시지, 오믈렛, 고로케 등)을 선택한 뒤 전문점에서 만든 카레를 맛보았다. 그동안 알던 카레와 비슷한 듯 다르게 보이던 전문점의 카레를 맛보며 방문 전 가졌던 의문은 수긍으로 바뀌었다. 카레 전문식당의 당위성이 수긍되는 맛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카레의 매력을 몰랐던 것 아닐까 싶었지만, 그 뒤로도 종종 학교 구내식당이나 집밥으로 만나던 샛노란 카레의 맛은 여전했다. 

 혹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조리한 차이일까 생각도 들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카레 본연의 맛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후 한참이 지난 뒤, 직접 만든 맛있는 카레를 맛보았다. 기회가 될 때 일본 요리를 하나씩 만들어 주시던 어머님께서는 어느 날 카레를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제껏 오뎅(おでん), 치라시스시(散らし寿司), 오코노미야끼(お好み焼) 등 맛있는 요리만을 알려주셨던 어머님의 다음 메뉴가 ‘카레’임을 알고 별다른 기대감이 없었지만, 그 마음이 ‘과연!’으로 바뀌는 데에는 한입 맛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먹어봤던 직접 만든 카레 중에 손꼽게 맛있었던 그 카레를 먹으며 만드는 법이 궁금해졌고, 어머님의 설명을 들으며 조리법을 지켜본 결과 알아낸 중요 비법은 ‘정성’이었다. 냄비에 버터(혹은 올리브유)를 두르고 양파, 감자, 당근, 버섯 등의 채소를 한 입 크기로 깍둑 썰어 넣어 고기와 함께 볶는다. 양파가 갈색 빛깔이 감돌며 투명해질 즈음 볶은 재료들이 모두 잠기도록 물을 넉넉히 붓는다. 감칠맛을 더해줄 약간의 우동스프(조미료)를 넣고 볶은 채소와 고기를 30분 이상 끓이며 카레용 육수를 우린다. 육수가 완성되면 불을 끄고, 30분-1시간 정도 그 상태로 두어 숙성 시킨다.  

 숙성을 거친 육수를 재가열하고, 끓기 시작하면 분량의 고체 카레(혹은 가루 카레)를 육수에 넣고 함께 끓인다. 카레가 모두 풀어진 뒤 5분 정도 더 끓여주면 완성. 오목한 접시에 밥을 담고 뜨거운 카레를 넉넉하게 끼얹은 뒤, (조금 더 정성을 얹는다면) 계란 프라이와 볶은 채소 등의 토핑을 올린다. 이때, 계란을 반숙으로 익히면 노른자가 카레와 어우러진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그날 어머님이 찬찬히 설명하며 만들어주신 카레가 계기가 되었을까. 나는 비로소 카레의 ‘고유함’을 알게 되었다. 알맞게 자극적이지만 결코 날카롭지 않으며한식(韓食상차림과 이질감 없이 어울리지만 이국적인 정서를 가득 품은 카레의 특별한 맛과 향과 매력을

 마침내 카레를 알게 되자, 곳곳에서 만나는 카레에서도 각각의 고유함이 느껴졌다. 카레 전문점의 카레나 식당에서 주문해 먹는 카레 외에도 급식 메뉴로, 구내식당에서, 집밥으로 만나던 일상 속 카레에서도 저마다의 카레가 품고 있는 고유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일본으로 온 뒤 카레는 한층 본격적으로 일상의 영역에 자리 잡았다. 지내면서 느낀 일본은 오뎅(おでん), 라멘(らめん), 미소(味噌) 등 대중적 선호도가 높은 식재료를 다양하게 응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카레(カレー)도 그랬다. 덕분에 마트에 가면 온갖 종류의 카레 제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일본의 마트 카레(カレー) 코너에는 온갖 종류의 카레가 가득하다
빵이나 밥에 간편하게 뿌려먹도록 만들어진 미니(ちょこっと) 카레

곳곳에 있는 카레 전문점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카레를 주재료(채소, 버섯, 해물,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등)와 단계별 맵기, 토핑(돈가스, 치킨, 소시지, 오믈렛, 고로케 등)을 선택해 주문할 수 있고, 카레의 기본 옵션인 밥 외에도 우동 면이나 파스타, 인도식 난(naan) 등을 곁들여 별미(別味)로 즐길 수 있었다. 또한, 일본의 편의점이나 빵집에서는 카레가 들어간 ‘카레빵(카레고로케)’을 판매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다양한 모습을 입은 카레를 여러 차례 발견하며 끝없이 넓은 카레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좌,가운데)카레가 들어있는 카레빵,(우)카레맛의 다양한 컵라면
(좌)난(naan)과 함께 즐기는 인도식 카레,(우)수족관 내(內) 레스토랑에서 판매하는 어린이용 카레

카레(カレー)의 고유함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누리지 못했을 무한한 카레의 세계를 보며, 미처 진가(眞價)를 모르던 것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첫인상이 별로였거나 호감이 없었다 할지라도 노력을 기울여 그것의 ‘본질’을 알게 되면, 나의 세계가 예측 가능한 범위를 뛰어넘어 확장될 수 있음은 음식뿐 아니라 모든 것에서 동일하지 않을까.  

 또한, ‘카레’를 표현하는 방식의 끝없는 다양함을 보며, 본질은 같지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때로는 밥과, 빵과, 면과 어울리며 때로는 맵게 달콤하게 강하게 표현되는 카레는 담겨있는 용기도 포장도 만들어지는 방식도 주로 사용되는 재료도 모두 다르지만, 그것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본질은 모두 ‘카레’이다. 그처럼 서로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는 것들의 ‘본질’이 사실 다르지 않을 수도 있음을 기억한다. ‘다름’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상처를 주고받았던 시간들. 소중한 관계일수록 서로에게 내어주고 싶은 마음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다름’을 감싸 안은 관대함을 품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다름’에 관해 생각하며, 서로의 ‘다름’을 가장 자주 접하는 이들과 카레 전문점에 방문했다. 메뉴를 찬찬히 살핀 뒤, 아이는 단 맛(甘い)의 카레 우동을, 나는 조금 매운맛(辛さ 2)의 버섯 카레를, 남편은 푹신한 오믈렛이 올라간 더 매운맛(辛さ 3)의 카레를 주문했다. 우리는 각자의 취향이 꼼꼼하게 반영된 카레를 먹으며, 상대에게 자신의 카레를 맛 보라 권하며, 각자가 선호하는 고유한 ‘맛있음’을 통해 서로의 카레 취향을 구체적으로 발견한다. 언제든 우리에게 찾아올 새로운 다름에 대비하며. 


오늘도 이곳을 방문해 주셔서 반갑습니다. ^^ 봄방학 기간이라 개인 시간이 부족해 일상의 글들이 밀리고 있어 아쉽습니다.ㅠ 이 글의 원문은 소믈리에 타임즈 '요리의 말들' 칼럼https://www.sommelier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915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편안한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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